양자적 관점에서 세상 읽어보기를 시작한지 벌써 300주라는 시간을 거슬러왔다. 사실 뒤를 돌아 실눈을 뜨고 지나 온 여정을 살펴 본 시간이 없어 어떤 것을 읽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것도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세상이 연속적인 것과 이산적인 것이 병행되어 간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큰 소득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걸어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언제나 다른 에너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에 대한 발견에 대한 선물을 받는다. 쉽게 말해보자면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과 왼손 법칙처럼 말이다. 플레밍의 법칙에서처럼 어떤 연속적인 흐름에 또 다른 어떤 연속적인 흐름이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이산적인 흐름이 일어나는 것도 있다. 그 반대도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유도된다는 개념을 취할 수 있다. 유도된다는 것은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미의 이면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이끈다는 것을 가진다. 이끌림은 또 다른 유도를 낳고 그 유도는 또 다른 이끌림을 낳으며 수많은 영향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초기조건이 가지는 양적 질적 정도에 따른 연쇄적 반응들의 차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번역들이 존재한다는 브루노 라투르적 시각을 선물받게 된다. 번역은 느낌에 대한 각자의 가치평가의 결과라는 화이트헤드의 순도 높은 철학적 사유에 힘입어, 각자의 속에 수많은 다른 것들의 흔적들이 마치 유전자코드처럼 줄줄이 뜨개질 되어 있는 관계라는 시간과 공간과 정서 간의 거리의 밀당들이 있었음을 또한 읽게 된다. 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와 존재자들은 관계와 번역 위에 서 있는 산물이라는 것과 그 산물이 결코 순간으로 정의될 수 없이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생성의 과정적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디지털은 사람 중심의 생명역사에 있어서 큰 방향의 전환이다. 생각을 언어로 문자로 번역하던 오랜 관성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 수 있게 한다. 생각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이다. 새로운 언어의 탄생은 생각을 담아내던 컨테이너의 교체다. 컨테이너의 교체는 컨택스트의 교체를 강제한다. 컨택스트의 교체는 혼란을 야기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방식의 패턴이 사라지고 새로운 패턴의 생성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정신세계에 일대 혼란을 야기한다. 스스로의 추정한 사실에 근거를 둔 행동계획이 번번히 좌절을 겪어면서 엄청난 시련을 맞는다. 베이즈이론의 관점에서, 사전확률분포에 대한 전면적인 교체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동안 축적해왔던 사후확률분포에 대한 근사값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다. 한번도 경험에 대한 상상도 불허했던 새로운 초기조건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다. 수많은 종류의 번역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당연하게 번역을 잘 할 수 있게 돕는 수많은 층위의 번역도구들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도 쉽게 해볼 수 있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불필요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의 생성을 위한 움직임일 뿐이다. 생명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있었듯이 단지 새로운 길을 내었을 뿐이다. 이 새로운 길은 포스트모너니즘의 실현을 예고한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여정을 걷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증분적 체험의 축적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모더니즘의 여정은 필연적이다. 모더니즘의 여정은 또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세상에서의 연속적인 흐름은 언제나 요소들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의 발견이 있다. 디지털은 이미 이 발견을 현실화했지만 사람만이 아직 이것에 대한 자각이 부재하다. 세상에는 아직 모더니즘적인 언어와 관습들과 문화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생성과 새로움을 준비하기 위한 모든 해체에 에너지의 투입은 필수다. 기회는 코 앞에 왔지만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기회를 잡는데 에너지를 쓸 여력이 없다. 이 안타까움을 어찌 할까나. ^^* #디지털건축가
양자적 관점에서 세상 읽어보기를 시작한지 벌써 300주라는 시간을 거슬러왔다. 사실 뒤를 돌아 실눈을 뜨고 지나 온 여정을 살펴 본 시간이 없어 어떤 것을 읽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것도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세상이 연속적인 것과 이산적인 것이 병행되어 간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큰 소득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걸어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언제나 다른 에너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에 대한 발견에 대한 선물을 받는다. 쉽게 말해보자면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과 왼손 법칙처럼 말이다. 플레밍의 법칙에서처럼 어떤 연속적인 흐름에 또 다른 어떤 연속적인 흐름이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이산적인 흐름이 일어나는 것도 있다. 그 반대도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유도된다는 개념을 취할 수 있다. 유도된다는 것은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미의 이면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이끈다는 것을 가진다. 이끌림은 또 다른 유도를 낳고 그 유도는 또 다른 이끌림을 낳으며 수많은 영향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초기조건이 가지는 양적 질적 정도에 따른 연쇄적 반응들의 차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번역들이 존재한다는 브루노 라투르적 시각을 선물받게 된다. 번역은 느낌에 대한 각자의 가치평가의 결과라는 화이트헤드의 순도 높은 철학적 사유에 힘입어, 각자의 속에 수많은 다른 것들의 흔적들이 마치 유전자코드처럼 줄줄이 뜨개질 되어 있는 관계라는 시간과 공간과 정서 간의 거리의 밀당들이 있었음을 또한 읽게 된다. 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와 존재자들은 관계와 번역 위에 서 있는 산물이라는 것과 그 산물이 결코 순간으로 정의될 수 없이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생성의 과정적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디지털은 사람 중심의 생명역사에 있어서 큰 방향의 전환이다. 생각을 언어로 문자로 번역하던 오랜 관성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 수 있게 한다. 생각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이다. 새로운 언어의 탄생은 생각을 담아내던 컨테이너의 교체다. 컨테이너의 교체는 컨택스트의 교체를 강제한다. 컨택스트의 교체는 혼란을 야기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방식의 패턴이 사라지고 새로운 패턴의 생성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정신세계에 일대 혼란을 야기한다. 스스로의 추정한 사실에 근거를 둔 행동계획이 번번히 좌절을 겪어면서 엄청난 시련을 맞는다. 베이즈이론의 관점에서, 사전확률분포에 대한 전면적인 교체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동안 축적해왔던 사후확률분포에 대한 근사값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다. 한번도 경험에 대한 상상도 불허했던 새로운 초기조건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다. 수많은 종류의 번역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당연하게 번역을 잘 할 수 있게 돕는 수많은 층위의 번역도구들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도 쉽게 해볼 수 있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불필요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의 생성을 위한 움직임일 뿐이다. 생명이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있었듯이 단지 새로운 길을 내었을 뿐이다. 이 새로운 길은 포스트모너니즘의 실현을 예고한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여정을 걷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증분적 체험의 축적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러하기에 모더니즘의 여정은 필연적이다. 모더니즘의 여정은 또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세상에서의 연속적인 흐름은 언제나 요소들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의 발견이 있다. 디지털은 이미 이 발견을 현실화했지만 사람만이 아직 이것에 대한 자각이 부재하다. 세상에는 아직 모더니즘적인 언어와 관습들과 문화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생성과 새로움을 준비하기 위한 모든 해체에 에너지의 투입은 필수다. 기회는 코 앞에 왔지만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기회를 잡는데 에너지를 쓸 여력이 없다. 이 안타까움을 어찌 할까나. ^^* #디지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