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자연을 보고 느끼는 순간부터 두가지 호기심을 건축했다는 과감한 가설을 바탕으로 기술과 과학과 철학 등이 놓치고 있는 공학(工學)의 재발견을 선언하는 <#공학의시간>이란 책을 하나 출간했다. 최근의 일이기도 하고 그것도 일이랍시고 적잖이 생각지도 않았던 접점들에 정신을 쏟아야 하는 시간들이 생긴다. 매주 목요일 올리는 디지털 세상읽기가 토요일까지 밀린 이유다. 이끌어주시는 분이 있어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통하여 세상의 출발점에 대한 수정이 있었고 삐에르 샤르댕 신부의 <인간현상>을 통하여 새로운 관점을 형성하는 방법을 선물받았다. 루만에 이르러 공학적 사유의 존재를 각성하며 후설과 디드로와 시몽동과 하이데거와 헉위의 대상의 존재를 파악하는 눈을 얻었다. 그런 선물들을 바탕으로 접하게 되는 스펜스-브라운과 브루노 라투르와 그레이엄 하먼과 클라인헤이런블링크 등의 사유는 최신의 뇌과학과 인지과학적 연구결과들과 어우르지며 비로소 근대인이 되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 맛들 중의 최고의 맛은 기존의 자연의 바탕 위에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거리에 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각이 있다. 1753년 디드로가 <자연의 해석에 대한 단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했던 세상에 대한 직관에 무려 70여년이나 걸려 도달한 것이다. 그 세가지 거리는 일종의 人爲的 장벽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그것을 건너갈 수 있는 빠스카를 선물받는 순간 무한으로 질주할 수 있는 세상을 바로 만나게 된다. 마치 서부개척시대에 말 달리며 깃발을 꽂아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다. 이미 실제적이고 실증적으로 우리들 앞에 그런 세상이 도래해 있다. 오랜시간의 관습으로 아니 멋지고 폼나는 디지털 시공간을 꾸미고 싶은 욕심에 엄두를 못내고 토목전문가들과 건축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라고 한 발 비껴서있는 것이겠다. 무한의 세상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걸어 온 시공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 옛날처럼 시행착오를 하며 그 무한 세상을 대하기는 뭔가 창피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두 다 알고 있고 또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며 건너가 본 나라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이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웅다웅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인류사 속에 한 켜 한 켜 그러한 문제들과 해법들에 대한 체험들이 재귀적으로 차곡차곡 쌓인 경험지식들이 가득하다. 샤르댕의 표현대로 제대로 된 반성의 시간 없이 기존을 전복하는 시간 없이 지나오며 지식이 지식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번역하여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건축을 위한 지식으로 정리하여 축적하는 工學의 존재가 있다. 공학은 지금의 지형을 파악하고 그 지형의 형성과정과 성장방향을 분석하여 그 방향을 시행착오없이 無爲한 상태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 인류의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디지털 건축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통하여 무한 시공을 채워나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은 이른바 사변적 실재론, 개체발생론, 행위자 네트워크이론, 발달체계이론, 일반체계이론 등이 일관되게 말하는 세상은 연민의 정으로 함께하는 것들을 부드럽게 보듬어 축적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어떤 것들로 채워진다는 화이트헤드의 ‘완전’에 대한 이야기에 기초한다. ^^* #디지털건축가
인류가 자연을 보고 느끼는 순간부터 두가지 호기심을 건축했다는 과감한 가설을 바탕으로 기술과 과학과 철학 등이 놓치고 있는 공학(工學)의 재발견을 선언하는 <#공학의시간>이란 책을 하나 출간했다. 최근의 일이기도 하고 그것도 일이랍시고 적잖이 생각지도 않았던 접점들에 정신을 쏟아야 하는 시간들이 생긴다. 매주 목요일 올리는 디지털 세상읽기가 토요일까지 밀린 이유다. 이끌어주시는 분이 있어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통하여 세상의 출발점에 대한 수정이 있었고 삐에르 샤르댕 신부의 <인간현상>을 통하여 새로운 관점을 형성하는 방법을 선물받았다. 루만에 이르러 공학적 사유의 존재를 각성하며 후설과 디드로와 시몽동과 하이데거와 헉위의 대상의 존재를 파악하는 눈을 얻었다. 그런 선물들을 바탕으로 접하게 되는 스펜스-브라운과 브루노 라투르와 그레이엄 하먼과 클라인헤이런블링크 등의 사유는 최신의 뇌과학과 인지과학적 연구결과들과 어우르지며 비로소 근대인이 되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 맛들 중의 최고의 맛은 기존의 자연의 바탕 위에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거리에 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각이 있다. 1753년 디드로가 <자연의 해석에 대한 단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했던 세상에 대한 직관에 무려 70여년이나 걸려 도달한 것이다. 그 세가지 거리는 일종의 人爲的 장벽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그것을 건너갈 수 있는 빠스카를 선물받는 순간 무한으로 질주할 수 있는 세상을 바로 만나게 된다. 마치 서부개척시대에 말 달리며 깃발을 꽂아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다. 이미 실제적이고 실증적으로 우리들 앞에 그런 세상이 도래해 있다. 오랜시간의 관습으로 아니 멋지고 폼나는 디지털 시공간을 꾸미고 싶은 욕심에 엄두를 못내고 토목전문가들과 건축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라고 한 발 비껴서있는 것이겠다. 무한의 세상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걸어 온 시공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 옛날처럼 시행착오를 하며 그 무한 세상을 대하기는 뭔가 창피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두 다 알고 있고 또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며 건너가 본 나라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이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웅다웅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인류사 속에 한 켜 한 켜 그러한 문제들과 해법들에 대한 체험들이 재귀적으로 차곡차곡 쌓인 경험지식들이 가득하다. 샤르댕의 표현대로 제대로 된 반성의 시간 없이 기존을 전복하는 시간 없이 지나오며 지식이 지식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번역하여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건축을 위한 지식으로 정리하여 축적하는 工學의 존재가 있다. 공학은 지금의 지형을 파악하고 그 지형의 형성과정과 성장방향을 분석하여 그 방향을 시행착오없이 無爲한 상태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 인류의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디지털 건축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통하여 무한 시공을 채워나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은 이른바 사변적 실재론, 개체발생론, 행위자 네트워크이론, 발달체계이론, 일반체계이론 등이 일관되게 말하는 세상은 연민의 정으로 함께하는 것들을 부드럽게 보듬어 축적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어떤 것들로 채워진다는 화이트헤드의 ‘완전’에 대한 이야기에 기초한다. ^^* #디지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