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스쳐간 글귀가 뇌리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산 속을 다람쥐마냥 오르내리는 아침 운동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이런 불현 듯 떠오르는 말이나 글귀들이다. 산 속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던지는 신호들과 발바닥에 닫는 불규칙적인 자극들이 내 머리 속의 기억들을 임의적으로 불러내는 새로운 사유활동을 자극하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며 기억을 재구성한다.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말이 이 순간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바로 평등하게 기억을 불러낸다면 내가 무슨 사유를 진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과 나의 의식과 나의 정동으로 만들어진 비선형적인 나의 기억인출체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 맞닥뜨린 사태에 가장 적합한 기억의 인출이 있을 뿐이다. 공정함은 합리의 질적수준이다. 1차원적인 해석은 각자의 만족도의 총합이 최대가 되게 하는 것이 공정함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관점이다. 이 관점이 합리적이지 않는 것은 불만족도의 총합을 최소화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불만족의 반대말이 만족이 아니라 만족과 불만족을 가르는 경계점이 존재에 대한 발견이 있다. 그 발견을 기초로 공정함을 다시 정의된다. 불만족이 없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만족도의 총합이 최대가 되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배려를 전제로 하는 조율만이 공정함을 쫓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의 자각에 이르게 된다. 불만족 경계는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익숙함이 식상으로 변하는 순간 그 식상은 불만족의 계열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뜻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불만족의 경계선을 끌어올리는 노력의 전제만이 공정을 논할 수 있다는 사실에의 자각도 따른다. 평등이 곧 공정할 수 있는 좌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이다. 오히려 ‘공정은 평등하다 !‘ 존재는 평평하다. 세상의 어떤 관계도 특권적인 지위도 인정될 수 없고 인정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 평평한 관계들 각각의 속에는 각자가 감당하는 경계치가 존재한다. 그러한 경계치들의 들쭉날쭉함을 조율이라 할 수 있다. 작자의 정동이 수용할 수 있는 경계치, 정동이 만족하지 못하여 감정이 유발되는 그 경계치가 존재한다. 이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열망의 과포화 상태를 안정시킬 수 있게 하는 여백을 제공한다. 그 여백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이 들어 설 수 있는 틈이 된다. 이제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말은 ’조율은 평등하다!‘는 말로 새롭게 번역된다. 디지털 세상은 조율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것도 빛 속도의 조율이 가능하다. 빛 속도로 다른 여백을 찾을 수 있기에 조율이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 무엇을 조율하는 것이 좋을까 라는 새로운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성을 전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물질 속도에 익숙한 우리는 컨센선스를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운다. 그러나 빛 속도의 세상에서는 ’실시간의 조율‘이 최선의 컨센선스를 모으는 방법이다. 조율에 조율을 얼마든지 거칠 수 있다. 빛 속도이기에. 그런 디지털 세상의 탁월함 앞에서 물질시대의 고민 덩어리였던 분배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어떠한 종류의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말은 새로운 생성을 위한 가치를 담고 있다. 말들은 의미를 세울 수 있게 해주는 정보이기에 그렇다. 웹3.0은 바로 모든 말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여 교환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새로운 분배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도대체 뭘 기다린단 말인가? ^^* #디지털건축가
어디에선가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스쳐간 글귀가 뇌리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산 속을 다람쥐마냥 오르내리는 아침 운동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이런 불현 듯 떠오르는 말이나 글귀들이다. 산 속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던지는 신호들과 발바닥에 닫는 불규칙적인 자극들이 내 머리 속의 기억들을 임의적으로 불러내는 새로운 사유활동을 자극하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며 기억을 재구성한다.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말이 이 순간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바로 평등하게 기억을 불러낸다면 내가 무슨 사유를 진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과 나의 의식과 나의 정동으로 만들어진 비선형적인 나의 기억인출체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다. 맞닥뜨린 사태에 가장 적합한 기억의 인출이 있을 뿐이다. 공정함은 합리의 질적수준이다. 1차원적인 해석은 각자의 만족도의 총합이 최대가 되게 하는 것이 공정함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관점이다. 이 관점이 합리적이지 않는 것은 불만족도의 총합을 최소화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불만족의 반대말이 만족이 아니라 만족과 불만족을 가르는 경계점이 존재에 대한 발견이 있다. 그 발견을 기초로 공정함을 다시 정의된다. 불만족이 없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만족도의 총합이 최대가 되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배려를 전제로 하는 조율만이 공정함을 쫓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의 자각에 이르게 된다. 불만족 경계는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익숙함이 식상으로 변하는 순간 그 식상은 불만족의 계열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뜻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불만족의 경계선을 끌어올리는 노력의 전제만이 공정을 논할 수 있다는 사실에의 자각도 따른다. 평등이 곧 공정할 수 있는 좌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이다. 오히려 ‘공정은 평등하다 !‘ 존재는 평평하다. 세상의 어떤 관계도 특권적인 지위도 인정될 수 없고 인정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 평평한 관계들 각각의 속에는 각자가 감당하는 경계치가 존재한다. 그러한 경계치들의 들쭉날쭉함을 조율이라 할 수 있다. 작자의 정동이 수용할 수 있는 경계치, 정동이 만족하지 못하여 감정이 유발되는 그 경계치가 존재한다. 이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열망의 과포화 상태를 안정시킬 수 있게 하는 여백을 제공한다. 그 여백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이 들어 설 수 있는 틈이 된다. 이제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말은 ’조율은 평등하다!‘는 말로 새롭게 번역된다. 디지털 세상은 조율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것도 빛 속도의 조율이 가능하다. 빛 속도로 다른 여백을 찾을 수 있기에 조율이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 무엇을 조율하는 것이 좋을까 라는 새로운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성을 전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물질 속도에 익숙한 우리는 컨센선스를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운다. 그러나 빛 속도의 세상에서는 ’실시간의 조율‘이 최선의 컨센선스를 모으는 방법이다. 조율에 조율을 얼마든지 거칠 수 있다. 빛 속도이기에. 그런 디지털 세상의 탁월함 앞에서 물질시대의 고민 덩어리였던 분배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어떠한 종류의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말은 새로운 생성을 위한 가치를 담고 있다. 말들은 의미를 세울 수 있게 해주는 정보이기에 그렇다. 웹3.0은 바로 모든 말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여 교환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새로운 분배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도대체 뭘 기다린단 말인가? ^^* #디지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