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통사의 생각잇기 브레인 Talk 시즌15, 242차 모임에는 성단근 교수님께서 ‘2050년의 지구가 묻다! 인간, 당신들은 누구인가?’ 시리즈 강연시간의 제8부의 총 9번째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제8부는 생태계 문제를 다루어 주십니다. 총 2회로 구성되어 있고 이번 강연에서는 지구생태계의 수많은 존재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간 종 이외에 어떤 존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교수님 특유의 예리함으로 짚어 주셨습니다. 강연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공부의 시작은 역시 ‘분별’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런 분별’을 낳는 ‘안목’이나 ‘통찰력’이라는 ‘분별의 도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함께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별의 도구’를 준비하고 벼린다는 것은 수많은 시공간의 체험들을 분별력을 잃지 않은 채 버텨내고 그 체험들이 주는 의미를 체계화 하는 추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함을 또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여흥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그들의 존재들, 우리들과 동등한 평평한 존재들을 인지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단근 교수님께 대한 소개는 특별히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과 우린 길을 달리 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이 되었나?
성 교수님께서 먼저 자연의 파괴 현장을 짚어 주신다. 열대우림이 지난 17년 동안 3분의 2가 파괴되었다는 말씀이시다. 그 원인이 ‘땅과 자원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이라고 짚어 주신다.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렇게 퉁치고 지나갈 수 없는 마음 속의 걸림이 있다.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욕망이 먼저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지가 먼저인가 하는 질문이 머리에 떠오른 채 강연이 끝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음을 느낀다.
강연 속에서 자연 속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각 능력과 생존을 위한 놀라운 능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연어와 뱀장어와 극제비갈매기와 귀신고래의 회귀본능 능력이 그렇고 요세미티이 레드우드의 생존방법이 그렇고 자이언트 세콰이어의 번식력이 그렇고 곤충들의 후각능력이 그렇고 나비들의 지능이 그렇고 매미들의 지능이 그렇고 또 그들의 대화 능력이 그렇고 그린란드 상어의 생존력도 그렇고 물곰의 생존력도 그러하고 토끼풀의 적응력도 그러하고 카리브해의 닭새우들과 흡혈박쥐들과 꿀벌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능력도 그러하다. 제비와 도요새의 여행 습관도 그러하다. 모두가 놀라운 발견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우리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가축화된 동물들의 면면들이 새롭고 또 그들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들도 새롭기 그지없다. 인간들이 동물들을 가축화하는 지식과 능력의 차이가 인류의 문명사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임도 새로운 발견하는 것은 덤이다. 동물들의 집단지성도 새롭고 흰개미들의 건축술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식물들이 품고 있는 치유의 물질들의 잠재성은 또 다른 희망을 품기에 충분하다.
강연 중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집중이 처음에 떠오른 질문과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질문이 정리가 된다. 그들은 저마다의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만의 앎을 만들고 그것을 도구와 무기삼아 생존을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넘침’을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연에 자연 속의 인간들에게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에 지대한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종이 자연에 파괴를 일삼는 것이 무지 때문인가 욕심 때문인가에 대한 질문이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현상이다. 안정된 먹이사슬 체계를 가진 지역생태계에 우연한,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방문하게 된 외래생물이 생태계의 교란종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 그것은 그 왜래종의 무지인가 욕심 때문인가. 사막 메뚜기떼의 습격이 그들의 집합신호 방송의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욕심이 집합신호용 호르몬을 퍼트리는 것인지. 이것은 한번 더 짚고 살펴봐야 할 문제지 싶다. 뿐만 아니라, 400살을 사는 그린란드 상어의 장수비결과 절대온도 0도에서부터 150도까지도 살 수 있는 극강동물 물곰의 생존비법을 생각하면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무엇에 무지한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질문들 속에 환경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인지하고 체험하고 행위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분명하게 삶의 loss function을 작동시키며 스스로를 조정하는 능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종은 기본적으로 감각에 대한 능력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유지했고 우리는 다른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들은 그런 길을 걸어갔고, 우린 우리대로 다른 길을 나섰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진핵생물 역(domain)에서부터 갈라져서 동물계(Kingdom), 척삭동물문(Division), 포유강(Class), 영장목(Order)을 거쳐 오랑우탄과 고릴라와 침팬지와 함께 사람과(Family)를 거치며 사람속(Genus), 인간종(Species)의 계보를 갖는 우리는 각 단계마다 어떤 것을 포기 하고 어떤 것을 택했는지가 흥미로운 대상으로 다가온다. 영장목에서 사람과로 분류 될 때 가장 큰 차이가 신경세포의 수초화라는 사실을 접하며 우리는 침팬지와 다르게 ‘우연성’에 몸을 던질 용기를 택했다는 해석을 해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또 하나는 우리는 감각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택했음이 분명하다. 세상의 진동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대신에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택했음을 과학적 발견에서 포착되는 것이 있다. 지난번 권영주 박사님의 ‘Scent is Magic!’이란 강연(240차)에서 인간종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감각세포들을 가지고 수많은 대상들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우리는 그런 길을 걸어 나왔다. 이승목 대표님의 ‘듣기의 놀라움’의 시간(239차)에서는 진동을 소리로 변환하고 그 소리들의 조화롭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 소리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정확성을 포기하는 대신에 차이에 대한 분별성을 강화하는 길을 걸어왔다. 스펜스-브라운이 말한 ‘인간의 분별과 지시는 내재적이다’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다가오게 한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무지한가? 왜 무지한 채로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들, 우리들과 평평한 존재인 그들의 아우성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 ##
또 한번 앎의 지평을 열어주신 성단근 교수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새통사의 생각잇기 브레인 Talk 시즌15, 242차 모임에는 성단근 교수님께서 ‘2050년의 지구가 묻다! 인간, 당신들은 누구인가?’ 시리즈 강연시간의 제8부의 총 9번째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제8부는 생태계 문제를 다루어 주십니다. 총 2회로 구성되어 있고 이번 강연에서는 지구생태계의 수많은 존재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간 종 이외에 어떤 존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교수님 특유의 예리함으로 짚어 주셨습니다. 강연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공부의 시작은 역시 ‘분별’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런 분별’을 낳는 ‘안목’이나 ‘통찰력’이라는 ‘분별의 도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함께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별의 도구’를 준비하고 벼린다는 것은 수많은 시공간의 체험들을 분별력을 잃지 않은 채 버텨내고 그 체험들이 주는 의미를 체계화 하는 추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함을 또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여흥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그들의 존재들, 우리들과 동등한 평평한 존재들을 인지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단근 교수님께 대한 소개는 특별히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과 우린 길을 달리 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이 되었나?
성 교수님께서 먼저 자연의 파괴 현장을 짚어 주신다. 열대우림이 지난 17년 동안 3분의 2가 파괴되었다는 말씀이시다. 그 원인이 ‘땅과 자원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이라고 짚어 주신다.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렇게 퉁치고 지나갈 수 없는 마음 속의 걸림이 있다.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욕망이 먼저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지가 먼저인가 하는 질문이 머리에 떠오른 채 강연이 끝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음을 느낀다.
강연 속에서 자연 속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감각 능력과 생존을 위한 놀라운 능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연어와 뱀장어와 극제비갈매기와 귀신고래의 회귀본능 능력이 그렇고 요세미티이 레드우드의 생존방법이 그렇고 자이언트 세콰이어의 번식력이 그렇고 곤충들의 후각능력이 그렇고 나비들의 지능이 그렇고 매미들의 지능이 그렇고 또 그들의 대화 능력이 그렇고 그린란드 상어의 생존력도 그렇고 물곰의 생존력도 그러하고 토끼풀의 적응력도 그러하고 카리브해의 닭새우들과 흡혈박쥐들과 꿀벌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능력도 그러하다. 제비와 도요새의 여행 습관도 그러하다. 모두가 놀라운 발견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우리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가축화된 동물들의 면면들이 새롭고 또 그들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들도 새롭기 그지없다. 인간들이 동물들을 가축화하는 지식과 능력의 차이가 인류의 문명사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임도 새로운 발견하는 것은 덤이다. 동물들의 집단지성도 새롭고 흰개미들의 건축술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식물들이 품고 있는 치유의 물질들의 잠재성은 또 다른 희망을 품기에 충분하다.
강연 중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집중이 처음에 떠오른 질문과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질문이 정리가 된다. 그들은 저마다의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만의 앎을 만들고 그것을 도구와 무기삼아 생존을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넘침’을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연에 자연 속의 인간들에게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에 지대한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종이 자연에 파괴를 일삼는 것이 무지 때문인가 욕심 때문인가에 대한 질문이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현상이다. 안정된 먹이사슬 체계를 가진 지역생태계에 우연한,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방문하게 된 외래생물이 생태계의 교란종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 그것은 그 왜래종의 무지인가 욕심 때문인가. 사막 메뚜기떼의 습격이 그들의 집합신호 방송의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욕심이 집합신호용 호르몬을 퍼트리는 것인지. 이것은 한번 더 짚고 살펴봐야 할 문제지 싶다. 뿐만 아니라, 400살을 사는 그린란드 상어의 장수비결과 절대온도 0도에서부터 150도까지도 살 수 있는 극강동물 물곰의 생존비법을 생각하면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무엇에 무지한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질문들 속에 환경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인지하고 체험하고 행위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분명하게 삶의 loss function을 작동시키며 스스로를 조정하는 능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종은 기본적으로 감각에 대한 능력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유지했고 우리는 다른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들은 그런 길을 걸어갔고, 우린 우리대로 다른 길을 나섰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진핵생물 역(domain)에서부터 갈라져서 동물계(Kingdom), 척삭동물문(Division), 포유강(Class), 영장목(Order)을 거쳐 오랑우탄과 고릴라와 침팬지와 함께 사람과(Family)를 거치며 사람속(Genus), 인간종(Species)의 계보를 갖는 우리는 각 단계마다 어떤 것을 포기 하고 어떤 것을 택했는지가 흥미로운 대상으로 다가온다. 영장목에서 사람과로 분류 될 때 가장 큰 차이가 신경세포의 수초화라는 사실을 접하며 우리는 침팬지와 다르게 ‘우연성’에 몸을 던질 용기를 택했다는 해석을 해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또 하나는 우리는 감각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택했음이 분명하다. 세상의 진동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대신에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택했음을 과학적 발견에서 포착되는 것이 있다. 지난번 권영주 박사님의 ‘Scent is Magic!’이란 강연(240차)에서 인간종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감각세포들을 가지고 수많은 대상들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우리는 그런 길을 걸어 나왔다. 이승목 대표님의 ‘듣기의 놀라움’의 시간(239차)에서는 진동을 소리로 변환하고 그 소리들의 조화롭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 소리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정확성을 포기하는 대신에 차이에 대한 분별성을 강화하는 길을 걸어왔다. 스펜스-브라운이 말한 ‘인간의 분별과 지시는 내재적이다’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다가오게 한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무지한가? 왜 무지한 채로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들, 우리들과 평평한 존재인 그들의 아우성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 ##
또 한번 앎의 지평을 열어주신 성단근 교수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