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석의 강연후기

238차_4차산업혁명의 진로와 하라리의 사피엔스&호모데우스

이순석
2022-05-12
조회수 276

새통사의 생각잇기 브레인 Talk 시즌15, 238차 모임에는 새통사 코너스톤의 한 분이시자, 4차산업혁명의 개념을 2015년 12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시하신 하원규 박사님을 모시고, 제안하신 4차산혁이란 개념의 착상과 그 원형에 대한 말씀과 함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연작을 통하여 인류가 걸어 온 길과 또한 걸어 갈 길에 대한 통찰을 정리해준 유발 하라리의 시선으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과감한 질문에 기초한 5차산혁의 방향을 전망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의 속도 앞에서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각자에게서 불안과 또 다른 희망의 교차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기에 하원규 박사님의 방대한 인류사와 전망서에 대한 정리와 강독은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무게중심 하나를 선물을 주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원규 박사님은 미래학자이시며, 지금은 스스로 디지털 토굴 속에서 희망을 빛을 쫓는 디지털 토굴인으로 사시면서, 한국시스템다이내믹스학회 고문, 행안부 지능형서비스분과 위원 등의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대학시절 로마클럽 '성장의 한계' 보고서를 접하면서 미래학자의 길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985년 중앙일보와 삼성전자가 공동으로 주관한 '21세기 논문대상(논문명:인간과 기계의 상호수렴과 대응과제)'을 받았고, 1992년에는 박사논문 'ICT패러다임 전환과 국가전략'으로 일본 정보통신보급재단 인문사회과학상에 선정됐었습니다. 35년 동안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상(체신부 장관상), 사이버 코리아(정보통신부 장관상), e-Korea(국무총리상), u-Korea(철탑산업훈장), 만물지능통신기반 중장기 전략 관련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디지털 혁신국가 어젠다를 발굴·기획했습니다. 2015년 정년퇴직 기념으로 '제4차 산업혁명'을 세계 최초로 출간하고, 현재는 2040년을 사정권에 넣은 '제5차 산업혁명'에 대한 그랜드 디자인에 매진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 박사님께서도 강연 중에 언급하신 것이지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다가오는 시대에 품어야 할 화두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화두를 가져야 한다는 한다. 왜? 기술의 발전은 사람이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목표가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된다는 1차 목표를 가졌지만, 이젠 바로 무엇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는 전망을 전제하기에 던져지는 화두의 교체에 대한 요청이다. 사실이 그렇다. 기술의 발전이 원하는 것을 갖는데 드는 한계비용을 점점 더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획득하는데 드는 한계비용의 제거는 역설적이게도 유한성이 전제되는 물질세계의 고갈내지는 파괴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모두는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원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소비했던 에너지의 용처를 바꾸어야 한다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원하는 것을 마음 것 얻을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기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다양한 경쟁을 해왔다. 살기위해서 경쟁해왔고,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경쟁을 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쉽게 획득할 수 있는 방법론들이 창발되고 그것을 소유화해온 과정이 산업혁명적 관점에서의 세상읽기다.

 

이제,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경쟁의 목적이 바뀌어야 함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는 것은 2가지의 새로운 질문을 생성한다. 첫째는 그럼 뭘 할 것인가? 둘째는 어떻게 갖고 싶은 것을 위하여 무한의 에너지 공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바뀐 질문은 다시금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왜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는 것이면, 그것이 사명이고 곧 생명이다. 살아있는 명령 내지는 살아가는 명령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명령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이 질문과 함께, 뒤를 돌아 실눈으로 자세하게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면, ‘생명’이란 것이 꾸준히 진화를 해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없던 시절에도 생명은 존재했었다는 발견이 있다. 사람이 중심(?)인 세상처럼 느껴지는 지금도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발견이 있다. 그리고 그런 발견 앞에서 사람 이후의 시대에도 생명은 또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조금 바꾸어 질문을 던져보자.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서 꾸준히 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나’인가? 세포들의 수명이 길고 짧은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평균 80일 정도면 우리 몸의 세포는 모두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고 과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나’는 ‘나’인가? ‘나’를 ‘나’라고 아니 ....새로운 몸이 나의 몸이라는 믿게 하는 ‘기만’의 메카니즘이 있는 것인가? ‘나’를 ‘나’로 있게 하는 별도의 ‘나’가 있음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몸의 나’와 ‘나라고 인식하는 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분명 ‘나’라는 ‘나’가 의지하고 있는 몸이 있고 그 몸과 또 다른 분리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이지 싶다. 몸과 분리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인가?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 ‘나’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하는 방법론은 세상과 호흡하며 그 세상을 서핑(Surfing)하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는 찾을 길이 없다. 변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변한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방법말고는 없다. 서핑이 그러하다.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서 서핑을 살아있게 한다. 어쩌면 ‘나’는 그런 서핑이다. 움직임 위에 정의된다. 타자와의 섞임 속에 존재하는 움직임 위에 내가 존재한다. 놓칠 수 없는 것은 타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부딪혀서 잠시 흔들리고 기우뚱하긴 하겠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나아가는 ‘나’가 있고 ‘너’가 있고 ‘그것’이 있고 또 ‘우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21c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사변적 존재론이나 객체지향존재론 등을 아우르는 신 유물론이 부상하는 이유를 사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오늘은 그렇게 신유물론에 사유의 몸을 싣고 한번 달려나가 본다. ‘나’가 그런 존재하면, ‘지능’은 ‘나’의 균형추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다.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수단은 언제든 교체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육신도 대체가능하다는 것도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수단들과 그 수단들의 조화와 ‘나’ 이외의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있게 하는 ‘그 무엇’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라면, 우리가 직면하는 기술문명들은 지금 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 모두의 뜻을 모아 그런 수단들의 소유에 불균형을 제거할 수 있다면, 모두가 풍요의 시대를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싶다. 수단들에 대한 소유의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무한에너지의 획득 방법론을 알고 있는 세력과 그렇지 않는 세력들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해볼 수 있겠지만, 결핍이 아니라 풍요의 시대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을 옮기는 순간, 우리는 ‘뭘 원하는가?’ 물질이 아닌 뭘 원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옮겨가야 함을 일깨워준다.

 

멍개의 유충에게서 운동을 위해서 ‘뇌’가 생성되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는 것이 최신의 현대과학이 말해준다면, 물질문명 위를 서핑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또 어떤 뇌가 필요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옮겨간다. 그것이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또 다른 생명이 존재하는 것일까? ....... ^^* ##

 

인류사를 관통하는 통찰을 바탕으로 언제나 선구적인 메시지를 던져주시는 하원규 박사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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