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석의 강연후기

234차_과학기자가 만난 한국의 물리학자

이순석
2022-04-13
조회수 149

새통사의 Talk-Factory가 시즌15, 234차 모임에는 50의 나이에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는 최준석 주간조선 선임기자님을 모시고 ‘내가 만난 한국의 물리학자’라는 제목으로 문과생의시각 아니 문과생이 새롭게 장착한 과학의 시각으로 바로 본 우리나라의 물리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특별하고 귀한 시간’임에 틀림 없습니다. 언론홍보학을 전공하고 주로 정치, 사회, 외교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문과 출신 기자분이 우연히 접한 리차드 도킨슨의 책을 시작으로 무려 500여권의 과학책을 소화하며 완전히 새로운 둘레세계를 가지게 되신 기자분이 마침내 과학이야기를 대중들과 나누는 과학작가로 발바꿈하여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질문이 자리잡게 하는 틈을 주었습니다. 삶의 궁극에 대한 질문을 과학에게서 답을 찾아간다는 과학작가 최준석 선임기자님으로부터 또 특별하고 의미심장한 영감의 주고 받음이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최준석 과학작가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글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고등과학원의 HORIZON에 실린 글입니다. https://horizon.kias.re.kr/15272/ 이 글 속에 최 작가님께서 최근 걸어오신 길을 겻눈질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86년 한창 언론의 주가가 고공을 찌르던 시절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출발하여, ‘과학’은 먼지의 터럭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기자이면서, 이집트 카이로 특파원, 인도 뉴델리 특파원 이라는 특별한 이력이 말해주듯이 아프리카, 중동, 인도 전문 국제전문기자 출신이십니다. 그렇게 조선일보에서 23년차의 베테랑 국제전문기자 역을 뒤로 한 채, 2010년 주간조선 편집장으로의 전보는 새로운 운명과의 조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책 장 속의 책을 갈아치우고 머리 속의 기억들과 관념들을 갈아치우며 두 세계를 잇는 고속도로 하나를 품게 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8년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며 커밍아웃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기자가 아닙니다. 과학작가이십니다. 과학자들의 이야기와 과학의 이야기를 말깔스럽게 나누는 특별한 작가이십니다. 출판 막바지에 이른 <과학 열전 I>, <과학 열전 II>, <천문 열전>이 기다려집니다. 참고로, 작가님이 운영하는 최준석 과학 수학 지옥 블로그를 여행해보시길 권합니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choi_joonsuk&categoryNo=61

 

 1. 물리학의 의미

 

최 작가님의 오늘 강연주제의 선정 이유를 HORIZON 글의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이 이렇다. ‘자연과학, 마음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학문’이다. 키우는 학문이 아니라 키울 수 있게 해주는 학문이다. 근력을 키우게 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는 여운을 남기는 제목이다. 서두를 양운기 교수와 나눈 맨체스트 대학교의 물리학과 이야기로 풀어주신다. 맨체스트 대학교의 물리학은 한 학년에 250명을 뽑는다고 한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 한번 놀라는 것은 물리학과에 교육 프로그램들이 ‘Physics for Art’에서부터 ‘Physics for Management’에 이르는 등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어주신다. 맨체스트 대학교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영국은 적어도 우리가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Physics를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양운기 교수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신다. 바로 ‘마음의 근력’과 맞닿는 지점이다. 곧바로 ‘훈련 받은 생각’과 ‘훈련 받지 않은 생각’ 간의 차이를 떠올리게 한다. 생각도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니, 잘 훈련받은 생각은 500층 높이의 집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잘 훈련되지 않는 생각은 기껏해야 움막 정도를 지울 수 있는 생각이 다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양운기 교수와의 이야기 중에 맨체스터 대학교의 공대에는 주로 제3세계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Physics를 공부한 학생이 공학을 전공하는 경우와 공대에서 학부에서부터 전공하는 경우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공학는 쓰임이라는 마련을 위한 에너지의 전환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기본적으로 많은 쓰임을 위한 마련을 위한 구조적 접근을 다룬다. 공학의 입장에서, ‘쓰임’이라는 단어가 항상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다. ‘쓰임’은 사실 지극히 인간중심적 사고의 산물이다. 엄격하게 이야기 하자면, 마련을 작동되는 방법을 익혀 그 방법대로 행해야만 비로소 마련되는 것이기에 ‘쓰임’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임’을 당하는 ‘쓰임’을 요청하는 입장들을 헤아리는 것이 제대로된 마련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관점에서, ‘쓰임’은 공학의 아킬레스와 같다. 왜냐하면, 공학은 그러한 요청들의 다층적이고 미묘한 관계를 읽어내는데 익숙하지 않기 떄문이다. Physics는 왜 그러한 요청이 있는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표면에 드러나는 요청들에 대한 심층적 관계 구조를 안다는 것은 보다 많은 관련된 요청들과 관계된 생태계와 호흡할 수 있는 마련을 다룰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Physics와 Engineering에 아쉬움이 한 가득이다.

 

가장 쉽게 Physics는 물질세계의 근원을 파헤친다. 근원은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 이면의 세계를 헤집고 다녀야만 한다. 감각할 수 없는 대상들이나 작용들에 대한 일관된 포착을 다루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감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모형’이 필요하다. 그 모형을 특징짓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간의 상호작용 등이 모형에 포함되어야 한다. 가설을 세우고 가설이 합리적이라는 전제하에 개념의 세계에 모형이 자리를 자치한다. 이것이 이론이다. 이것을 다루는 물리학이 이론 물리학이다. 개념적으로만 그러할 것 같다는 것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이것을 실험으로 증명하길 원한다. 그 모형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하는 ‘궁리’가 요구된다. 이것이 실험물리학의 대상이다. 포착을 궁리하고, 포착하는 방법론을 정립하고 포착을 위한 실험을 통하여 모형의 진위를 가린다. 이 ‘포착을 위한 궁리’는 ‘마련을 위한 궁리’를 다루는 공학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초과학이라고 분류되는 영역에서 공학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궁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포착을 궁리하는 것과 ‘마련’을 궁리하는 것은 엄연히 벡터가 다른 영역이다. 포착하는 궁리를 통하여 ‘포착하는 기술’이 탄생하고 마련하는 궁리를 통하여 ‘마련하는 기술’이 탄생한다. 독창적인 ‘포착하는 기술’은 독창적인 발견을 매개한다. 하나의 이론의 탄생을 위해서는 ‘독창적인 모형’과 ‘포착을 위한 궁리’와 ‘포착하는 기술’ 등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하기에, 노벨상을 이야기 하기 전에 그 세가지를 분별해낼 수 있는 지력이 필요하다.

 


2. 다시금 공학을 생각한다.

 

최 작가님께서 세상의 명덕 明德을 밝혀보기 위해 과학책 읽기의 여정을 걷고 있다면, 지금 공학 工學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책’ 읽기가 아닌가 싶다. 철학은 세계를 관통하는 근원적 원리를 밝히는 질문과 답을 쫓는다. 과학이 138억년의 생명진화역사를 환원적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면, 철학은 138억년의 생명진화역사를 창발적이고 산화적인 관점에서 읽어낸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이 그러했다면, 그런 이유로 그러했다면, 이렇게 하면, 다음은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한다. 마련이라는 창발을 위해서는 오히려 세계의 근원을 따지고 새로운 창발에 대한 거대한 실험이 필요하다. mRNA의 과학적 연구결과로 부터 ‘몸’을 유지하는 항체의 생성을 위한 설계도를 인공적으로 마련하는 창발적 시도를 통하여 성공을 거두었듯이, 핵융합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로부터 핵융합 발전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은 ‘포착을 위한 실험’이 필요하다면, 공학은 ‘마련을 위한 실험’이 필요하다. 과학이 상충하는 다양성을 밝히는 것이 사명이라면, 공학은 다양성의 상충을 다양성의 대비라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공학은 상충하는 다양성의 대비를 위한 조율을 다룬다. 그 조율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한 실험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 최소작용의 법칙의 길을 따르는 ‘기술’의 탄생이 있다. 그러나, 이 땅에는 마련을 위한 공학 실험에 대한 투자는 존재하지 않고 기술에 대한 투자만이 난무한다. 패러다임을 주도하지 못하는 이유이지만, 여전히 기술에서 First Move를 찾는 뒷북만이 무성하다. 패러다임에는 패러다임을 운영하는 생태계가 있고 생태계에는 생태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주인이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 속의 First Move는 주인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내쳐진다는 사실을 항상 경험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과학분야에서 독창적인 이론적 모델이나 독창적인 포착 방법론에 대한 도전 없이 ‘노벨상’에 침을 흘리는 것과 매 한가지 현상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발은 기존 패러다임의 근원에 배한 밝힘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창발은 환원주의로 설명되지 않는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공학에는 마련을 위한 모형이 있고 모형의 마련을 위한 방법론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공학의 마련, 국가 공학의 마련은 국민 만인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간접자본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한다. 21세기 철학이 확장하는 세계관을 피력하듯이 세계가 확장되는 만큼 인류 만인을 위한 공통의 새로운 사회간접자본들은 차곡차곡 쌓여져야만 한다. 만인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스럽게 ‘멋’스럽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라면, 진보는 또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에너지를 축적하고 지키는 것이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라면, 그것은 뭘 위한 것이고, 각자를 위한 나눔이 없이 그것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답을 구해야만 할 때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생명진화의 역사는 그런 중력파의 힘으로 이어져 왔다. 공학은 그런 나눔의 에너지를 만인을 위한 마련을 실현하며 역사와 항상 함께 해왔다.

 

뒤늦게 뜬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한창 성장의 가도를 달리던 공학의 싹을 잘라내어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산업하나 잉태시키지 못하는 비루한 상태에 발 묶여 있음에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과학의 싹마저 지우르는 세태에 분명한 경고장 하나를 이렇게라도 띄워 놓고 싶다. ^^* ##

 

과학을 넘어 공학으로 건너가기를 할 수 있는 영감을 듬뿍 선물해주신 최준석 작가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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