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강연모음

특별강연_ 강수원 부원장(밝은빛태극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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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통사를 시작하여 6년이란 시간동안 200분의 명사들을 만나서 그분들의 삶과 경험 속에서 자리잡은 생각들과 시각들을 나누는 멋진 지적교류의 향연을 즐겨왔습니다. 160회 정도에 이르러, 이러한 지적향연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왜 하는가? 뭘 기대를 하는가? 라는 주위분들에게서 받았던 끊임없는 질문들을 뒤로 하고, 우리 자신, 새통사에 똑같이 던져보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었던 답 하나는 <생각나누기> 플랫폼, 생각나누기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뭐?’ 라는 질문 앞에서 뒷머리를 긁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사리 모시게 된 연사님들과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준비한 연사님들의 노력을 단순히 지적향연의 즐김으로 매번 끝내고 소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새통사가 추구하는 ‘통찰 洞察’은 ‘사물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관찰’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만족들이 ‘굳은 살’이 되어 있는 과학기술계, 좁게는 대덕연구단지 사람들의 모습을 그 회의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회의의 발견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의 필요성을 느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여유로 특별한 강연의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밝은빛태극권센터 강수원 부원장님께 ‘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시게 되었는지?’ 그 연유와 여쭙는 과정에서, 우주와 자연과 사람들에 관하여 과학기술계가 밝혀 낸 수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서로간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들 속에 질서를 이루고 있는 ‘그 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학기술계는 그런 발견 자체에 대한 즐거움으로 끝냈지만, 그런 발견들을 체화시켜 ‘바르게’ 사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나가려고 하는 방법론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방법론을 만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다름을 발견하게됩니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에 삶의 방식 또한 자연스럽게 갈리게 됩니다. 어느 쪽의방향, 어느 방향의 길이 더바람직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또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궁금증에 대한 모든 답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2가지 답은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는 ‘고집’이었고 또 하나는 ‘소통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답이 궁금하시다면, 강수원 부원장님께서 차분하게 설명하는 강연동영상 속에서 태극권 수련을 하시는 분들의 철학의 뿌리를 접하실 수 있을 것이며 그 수련의 방법론이 추구하는 소통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수원 부원장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해주시는 일이 없으시기에, 지면을 통해서도 특별히 소개드릴 것이 없습니다. 세세하게 캐묻지 않은 직무유기가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히 주시기를 부탁 드리며, 예전에 <여성신문>에 자신을 살핀 내비친 이야기를 대신 전합니다. ‘택견, 검술, 체선... 초등학생 때부터 안 해본 운동이 없다고 했다. 몸에 관심이 많고 운동을 즐기던 조각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 소개받은 ‘고수’를 사부로 모시면서 그는 태극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20여 년이 흘러 이제는 사부 박종구 교육원장, 엄기영 원장과 함께 밝은빛만의 태극권 수련법을 전파하고 있다.‘ (2015.1.16.)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겠지만, 강 부원장님의 매력과 인간미는 문자로 표현하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현장이 문자의 세계에 포획된 삶이 아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1.인간은 무엇인가?


강수원 부원장님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바로 ‘고집’이라고 말씀해주신다.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변하는 것’이라는 물리학적 발견을 5000여년전의 선현들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수는 없으나, 현대인들은 세상은 불확신성 가득한 비선형의 세계라고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체화시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르다.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 현대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의 한계에서 온다. 강 부원장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현대교육에 순응한 지식인들과 강 부원장님이 세상을 읽는 방법이 다르고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이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새통사의 167차 모임(2019.9.6.)에 다녀가신 홍성욱 교수님께서 던져주신 충격적인 질문이 불현 듯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자연이 우리는 모르는 완벽한 실재이고, 우리가 완전하게 모르는 대상인가, 아니면 자연은 원래 모호하고 불명확한 것이지만 인간들이 깔끔한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 시간 이후로, 새통사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하나 열렸다. 과학은 세계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라는 시각이었다. 과학자들에게는 세계를 구성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 있다. 바로 모형이다. 인간에게 입력되는 헤아릴 수 없는 자극들을 그 틀을 기준으로 비교한다. 문제는 ‘그 틀’이 유동적이거나 역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 틀’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자연의 본 모습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고 고착화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분별하기 보다는 자신의 틀의 기준으로 분별을 한다. 전형적인 말과 행동이 ‘판단’이다. 판단은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비판은 다름이 아닌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특징이있다. 세상은 아날로그적인 연속이기에 이산적 시점으로보면 끊임없이 판단하고 시비를 가린다. 연속적인 사태 앞에서 그 판단과 비판이 끝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항상 그 판단이 화자의 것과 일치할 수 있는 경우는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 부원장님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문자세계의 지식인들과 사뭇다름을 발견한다. 그는 감각의 레벨에서의 분별을 통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취한다. 세상이 우리에겐 모든 것이 불확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선은 감각된 자극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인내(?)의 시간’을 거친 후 적절한 반응을 하는 방식이다. 적절한 반응이 곧 善임을 말씀해주신다. 탁월함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善은 그 탁월함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몸은 그 탁월한 반응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두가 조율하고 또 반응에 모두 동참한다. 그것이 ‘하도낙서’의 원리라고 설명하신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 탁월함의 반응을 ‘차이(difference)’라는 것으로 풀어낸다. 들뢰즈는 하도라는 공학적 판짜기의 결과물인 구조를 인정하는 가운데, 사태라는 차이를 통하여 세상을 설명한다. 그러하기에 강부원장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도낙서’라는 동북아시아의 뿌리 깊은 철학이 마치 들뢰즈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강부원장님의 말씀 속에 그 구조가 고정적이거나 정적인 개념과는 거리가있다. 형체는 고정적이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면, 들뢰즈와 5살 어리지만 동시를 살면서 들뢰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과 궤를 같이하는 듯하다. 데리다가 ‘하도낙서’를 접했다면, 더 멋지고 비판이 덜한 새로운 철학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된다.

첫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새통사의 모든 멤버분들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인지과학이 말하는 우리 뇌의 system-2를 저 멀리 내던지며 사유(思惟)의 세계를 여행해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식사시간에도 이 질문을 놓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들과 다르게 문화라는 것이 있다. 문화라는 정의 자체도 인간의 작위적인 것이 아닌가? 동물의 세계에서도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초기 단계의 문화라는 것이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지않는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문화의 여부말고는 없는가? 단지 우리가 문자언어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닌가? 돌고래들은 문자언어가 아닌 느낌의 언어(?)로 대화한다고 하지않는가? 기계들도 문자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대화한다. GTP-3라는 언어창작기계는 인간 사용에 대한 통계치들만을 바탕으로 스스로 인간의 말하기 흉내를 낸다. 이 또한 1950년에 클로드 새넌이 그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밝혀냈던 것들이다. 돌고래의 대화에 대한 통계치만 있다면 GTP-3는 또 돌고래와의대화도 가능하다. 돌고래와 기계들이 서로 대화하며 돌고래가 가지는 메타인지력을 기계가 배우면 그들도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문화라는 정의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도낙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던져준다. 여전히 평범한 우리가 소화해내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2.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강 부원장님은 강연에서, ’우리 몸 자체가 고집이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몸은 유전의 결과인데? ..... 그러고 보니, 형태를 갖춘 모든 것이 ’고집‘임에 분명해보인다. 말랑말랑한 사람의 머리 속에도 고집이라는 생각의 형태가 존재하듯이, 그것이 물질로 현재화된 것이 우리의 몸이요 자연이요 우주다. 모든 것이 고집의 결과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미 고정된 형태 속에 갇힌 상태다. 그런데 어떻게 ’고집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인가?

자유하는 방법에 대해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접근법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차이보다는 동양이 훨씬 구체적이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떼이아르 샤르댕 신부의설파다. 지구생명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고집의 틀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개념적 사건을 ’반성‘을 통한 관계의 발견이라고 설파다.(인간현상) 비슷한 시기에 인지발달이론을 다듬었던 삐아제의 인지적 구성주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고집이라는 틀 속에서 고집의 틀 바깥의 어떤 것들과의 관계라는 ’동아줄‘을 통하여 틀 속을 자유자재로 들고 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의 탈출법에 대해서 강 부원장님께서 풀어주는 내용을 보면 동양의 것이 훨씬 더 구체적이며 조금은 다른 접근이 읽힌다. 동양은 사람을 정(精), 기(氣), 신(神)으로 나눈다. IT영역에서 시스템을 Hardware(정)과 Operating System(기)과 Software(신)으로 나누는 방법과 유사하다. 정은 생명체를 유지하는 모든 것이고, 기는 신에 따라 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고 신은 7정에 반응하는 욕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관계가 기의 레벨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런 반성의 과정을 통해서 신 속에 고집덩어리인 ’모형‘이 자리잡는 영역이다. 각각에 대한 방법이 다르다. 정에 대해서는 절제로, 기에 대해서는 관계와 조율의 훈련으로, 기에 대해서는 실상에 대한 감응을 통한 자제나 배려로, 신 속에 자리잡는 허(虛)는 지향으로 고집의 틀을 벗어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신다. 범인들이 제일 힘든 부분이 바로 기(氣)와 신(神)의 고집에 대한 탈출이다. 새통사라는 커뮤니티 활동도 바로 기의 고집틀에 대한 탈출의 노력의 일환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천에 이르러 실패한다. 그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는 질문을 이어가면 바로 실상에 대한 감응이라는 소통의 방법론에 이르게 된다. 감응은 감각의 지각과 욕망이 직접적인 소통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타자의 욕망이 타자의 전달행위를 통하여 나의 감각에 지각되고 그것이 바로 나의 욕망으로 연결되는 것, 서로가 맥락에 일치하게 되는 것을 감응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 같다. 타자의 욕망을 읽은 나는 즉시 나의 모든 것에 타자의 욕망에 반응을 답을 요청한다. 그것이 기(氣)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다. 공학적인 관점에서 최적해 (optimal solution), 즉 모든 부분의 불편함에 대한 총량을 최소화하는 반응을 도출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방법은 신경망 기반의 인공지능에서 이미 모사하고 있는 방법이다. 석찬을 함께 하며, 이 지점에서 우리는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최선의 반응, 즉 상황에 따른 최선의 반응에 대한 선택이 선험적인 것인가 아니면 역사성과 경험적 인지를 바탕으로 행하는 것인가, 또 아니면, 훈련을 통해서 그 선험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강 부원장님의 대답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몸의 모든 것에 답을 요청하고 그 모든 것이 답을 보내주고 짧은 시간에 수렴상태로 가는 조율과정을 거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곧 선험적이고 역사성을 가지는 것이고 경험적 인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인간은 그 고집의 틀을 건너갈 수 있어야 비로소 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이지만, 1초만 지구촌 어디에 있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초연결시대에서, 우리 몸의 고집에 대한 탈출 방법, 즉 건너가기 방법처럼, 사회나 국가의 거버넌스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건너가기가 필요해 보인다. 사회적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와 우리 몸이 너무 많이 닮아있음을 발견한다. 정, 기, 신, 허 각각의 재귀적 자기진화와 정, 기, 신, 허 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결합을 또한 끊임없는 창발의 생성이 가능한 사람이나 사회는 끊임없는 진화해가는 생명체다.


3. 인간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


강 부원장님께서 강연의 마지막에 화두를 던져주신다. ’여러분은 인간으로서 완성을 이루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 사실 이 화두는 인간 모두에게 처음부터 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완성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또 다른 뭔가를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확실성 가득한 세상에서 이 불확실성을 해결할 필수적인 다양성이라는 것을 정의할 수가 없다. 불확실이 주는 당연한 대답이다. 그럼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다양성의 잉여‘가 유일한 답이라고 한다. 나, 나와 너, 나와 너와 우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와 환경사이의 경계는 정의할 순 없지만, 다양성의 잉여로 그 경계의 언저리를 커버할 수는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세계를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구성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나 혼자보다는 나와 너, 나와 너 둘 보다는 나와 너와 우리라는 사회가 하나의 진화해나가는 생명체로 자리매김을 하고 끊임없이 세계를 재구성해가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바로 나와 너와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강 부원장님을 12시 3분전까지 붙들고 쫓았던 우리의 궁금증 하나는 바로 소통이었다. 세계적인 안무가의 서윤신 대표의 질문이 있다. ’왜, 동양의 무술이나 동양의 무용은 움직임이 안으로 모아지는 것인가, 서양의 무술이나 춤들은 몸의 바깥으로 과감하게 뻗어나가며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접점을 찾고 있지않는가?‘ 전문분야가 아니라, 조용히 두분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태극권을 하는 강 부원장님의 소통과 서 안무가님의 소통에 차이를 발견한다. 나아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과의 차이를 발견한다. 강 부원장님의 소통은 ’상대을 읽는 것‘이 중심이고 서 안무가님의 무용은 ’자신의 이야기의 표현‘이 중심이다.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서 안무가의 것에 가깝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표현에 공감이 더해진 개념임을 발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 중심적 소통과 자기중심적 소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집에 대한 탈출을 이야기하며 ’정‘의 영역의 고집에 대한 탈출에 대한 것을 빼놓고 넘어왔다. 바로 이 소통의 방법론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 때문이었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자면, 태극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정 영역의 고집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이끌어 낸다. ’(전통진가태극권, 2020)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신체활동, 감정, 생각은 몸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위들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발생한다.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움직임에서 이 상호관계를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하는 신체긱한이 바로 ‘관절’이라는 사실이다. 신체의 다양한 부위들이 상호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이며, 모든 움직임에는 관절의 작용이 함께한다. 따라서 신체부위들의 움직임이 특정방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 방식대로 감정이나 생각 또한 고정되어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관절의 움직임이 그 방식대로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반대로 보면, 관절을 통해 움직임을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으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상황에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사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해보면, 모두는 아닐 수 있을지라도, 여러개의 관절들의 적절한 조합을 이루면 적절한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자언어와 대별되게 ’몸 언어‘라고 표현해보고 싶다. 물질적인 것들의 조합으로 비물질적인 생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입자와 입자들과 상호전환 관계의 필드의 상호작용으로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심지어 입자와 장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된다는 물리학적 발견에 비추어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몸의 형제 속에 갇힌 고집을 물리적 장의 개념을 통하여 정이라는 고집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태극권은 그런 기조에서 ’몸언어‘를 탄생시키고 몸으로 상대를 읽고 (청경, 聽勁), 모의맥락을 읽고(동경, 憧勁) 상대를 그대로 읽는(신명, 神明)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환담을 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뇌가 왜 가소성을 가지는 형태로 진화를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강 부원장님은 그 대답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라며 웃음으로 답을 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 태극권이 천인합일을 통한 무한을 추구하고 있는데, 공학은 천인합일의 길을 가속화 할 수 있는 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면, 둘이 만날 수 있는 광장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


태극권이 거대한 스케일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한걸음 한걸음 실천으로 증명해주시는 바쁜 삶 속에서도 새통사의 시즌12 마무리를 해주시고자 특별강연에 흔쾌이 허락해주시고 시공을 시공을 할애해주신 강수원 부원장님께 다시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