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강연모음

200612 제180차_ 2050년 지구: 인류, 너는 누구인가 (I) (성단근 교수, KAIST 종신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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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차. 3월 첫주에 문을 열었어야 할 새통사 <시즌11>의 첫 모임의 통산한 모임의 숫자입니다. 3개월을 훌쩍 넘겨 이제서야 개강의 문을 엽니다. 그것도 반쪽짜리로. Eric Yuan이 중국에 있는 여자친구와 화상데이트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Zoom을 통해서 말입니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되기 시작할 1월 말쯤에 KAIST 종신명예교수로 계신 성단근 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었습니다.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인간들이 지구 위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각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또 우리는 미래를 위한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있는가에 대해서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며, 어떻게든 합당한 방향성을 찾고 모두의 공감대 속에서 바른 움직임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 말씀과 함께 시즌11의 첫 강연의 포디움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그렇게 시즌11의 첫 포디움이 준비가 되었습니다. 4개월동안 온갖자료를 수집하고 종합하셔서 인류가 안고있는 8개의 문제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서로 얽히고 설킨 복잡한 문제들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 위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실려고 온 에너지를 쏟아주셨습니다.    


시즌 11 개강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웨비나라고 하는 온라인의 웹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낯설고 익숙하지 환경이었습니다. 노트북의 작은 작은 화면 속에서는 강연하시는 분이 청중들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고, 반대로 청중들 또한 강연자가 하는 온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언어 전체를 읽을 수 없기에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의 찐하게 젼해져 왔습니다. 서로의 소통에 있어서 실시간적으로 피드백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부연설명을 스스로에게 강제하게 되는 효과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형식이 시공간에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첫 개강 시간은 8개의 문제 중에서 1개의 문제, 즉 기후변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만을 마무리하고 이후의 시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7개의 문제와 우리가 가져야할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는 차례로 시간을 만들어 성단근 교수님의 직강을 청해듣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웹세미나가 가지는 장점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출장 중에 계신 분들도 원격에서 참석을 해주셨고, 차를 몰고 가는 중에도 참석을 해주시는 등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통찰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단근 교수님을 한낱 소리문자들로 소개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입니다. 평생을 다하여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낸 박사만 55명이며, 또 이 중 스승의 길을 따라 또 제자를 길러내는 대학교수의 길을 걷고 있는 이가 28명이나 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왜 문자로 성 교수님을 소개하기가 벅차해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교수님은 보통의 공학자들과 달리 통신네트워크 분야의 전 분야- 유선, 무선, 위성, 센서 등-뿐만 아니라 통신네트워크가 기반이 되는 모든 응용분야를 제자들과 함께 유영을 하신 분이라, 성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시각은 남들과는 양과 질에서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지금 인류의 반성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자체도 어떤 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의 관점과 전체의 관점을 함께 읽어내실 수 있는 남다른 차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이해됩니다. 자본주의 위기를 감지하게 되는 시간, 코로나19가 세상을 또 우리의 삶을 재조명해볼 수 있게 하는 시간에 Gestalt적 optimization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각은 실로 엄청한 힘이 아닐 수 없을 것입라 사료됩니다. 


1. 건방인가, 무지인가?


성단근 교수님의 강연시작과 함께 펼쳐주신 첫 슬라이드를 보면서부터 후기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머리 속에 맴도는 말이 바로 저 제목이다. 인류는 건방을 떠는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무지의 소치인가. 


“2050년 지구가 묻다! 인류, 당신들은 누구신가요?”


첫 슬라이드는 태양계와 천리안 2가 찍은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는 직경 10만광년, 두께 15,000광년의 원반 모양의 형태 속에 4천억개의 별을 품고 있다. 말이 좋아 10만광년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사실, 빛은 초당 30만km를 달리지 않는가. 시간당 1억km를 달리는 속도다. 1억km는 서울과 부산을 135만번 왕복하는 거리다. 지구를 27,000번을 도는 거리다. 우리 자신은 기껏해야 0.002km의 존재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있기까지 우주는 137억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왔단다. 이 광활하고 거대한 시공간속의 하나의 점보다도 작은 정의하기 조차 힘든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고 어께 힘을 잔뜩 주면서 또깍또깍 우주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일가? 무엇 때문에 미물과 같은 존재가 이리도 당당할 수 있는가. 한 치의 위축됨이 없이.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무지한 것일 것이다. 모르면 용감해지니까. 모른다는 것은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느낀다는 것은 나 바깥의 존재들이 보내는 자극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 이외에 존재하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한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타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으리라. 도처에 늘렸다고. 무례하다는 것도 결국은 타자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자와 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행동과 언행에 조심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누구나 거침없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 행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그 관계를 알고 있음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무지와 반대의 개념이다. 이처럼 알면 타자와 조율을 갖게 된다.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속의 메카니즘도 내 속에 들어오는 자극들과 조율의 과정을 거쳐 최선의 행동을 찾는 메카니즘을 갖고 있기에. 지구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를 느끼시는가 라고..... 성 교수님께서 짚어주시는 인류의 행하고 있는 행위들의 부작용은 분명 우리가 무지한 존재이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자. 미물같은 존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통 속에서 전혀 위축되거나 두려움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교수님께서 넘겨주는 장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앎이다. 나의 몸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준 과학의 힘이다. 과학이 앎을 추구하면서 함께 깨우친 진귀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real)과 실체(reality)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알아차림이 주는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나타난 현상들을 분석하여 실체(reality)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인류는 실체(reality)에 대한 가정을 통하여 거꾸로 현상을 설명해내는 ’가로지르기‘라는 새로운 앎의 알아나가는 방식을 깨우친다. 그 ’가로지르기‘의 출발은 ’반성‘이었다. 걸어 왔던 시공간을 되돌아 보면서, real과 reality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우주의 역사에서 빅뱅만큼이나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뒤돌아보는 순간 내가 믿고 있었던 것들이 진짜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있게 하였다.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믿고 있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실체(reality)에 대한 상상을 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정이요, 추상이요, 개념의 생성이 모두 이러한 것이다.  고전물리학이 현재물리학으로 양자물리학으로 알을 깨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바로 새로운 출발선이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유한한 존재가 자신을 벗어나 집을, 동네를, 도시를, 나라를, 지구를, 우주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길 수 있는 출발선 앞에 올 수 있었던 계기다. 그렇게 우린 미물의 존재이면서도 대자연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 



2. 손자님들 ! 미안합니다.


우린 그렇게 우주를 품을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 자구 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개체들과 비교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 자연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만들어 왔지 않은가? 창을 열고 바깥을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며 지나 왔는지? 있는 그대로를 소비하는 수렵의 시대를 졸업하고 원하는대로 소비하는 생산의 시대를 걷고 있다.  우리에게 깨우침을 선물했던 조상들처럼, 우린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만들며 지내왔던 시간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동시간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행동이 타자에게 지구에게 또 태어날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앎‘이 존재하는가. 없는것인가. 그럼 무지한 것이 아닌가. 무례한 자들이 아닌가.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무례하고 천박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다시 농업혁명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닌가, 언어의 혁명이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자연 앞에서 숨 죽이며 살아가는 존재들과 무엇이 다른가. 함께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되돌아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실체와 어떤 간극이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우리들에게 대잔연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큰 선물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후세들에게 큰 ’앎‘을 선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거대한 존재다. 그래야만 건방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자. 


과학자들이 수고로움으로, 시간을 되돌려 인류에게 반성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지구행성의 그동안의 온도변화를 보라. 지표가 미처 식지 않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줄곧 조율을 하며 온도를 낮추어 왔다. 그런데, 인류가 건방을 떨기 시작한 시점부터 정확하게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치솟기 시작한다. 그것도 공기중의 탄소의 농도와 온도상승이 비례적으로 일치함을 확인시켜준다. 정확한 사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장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온도도 매년 상승함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즉각적인 조치를 명령하는 도표들이다. 과학자들의 또다시 수고로움을 더하여, 우리에게 행동수정의 방향성에 대한 ’앎‘을 선물해준다. 


’1.5도‘


인류가 지켜내야할 온도 상한치다. 에어콘으로 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어콘은 켜우 작은 집 하나 온도를 낮출 수 있을 뿐이다. 지구라는 집 전체를 식혀야만 한다. 지구라는 집안 에 사는 모든 개체들은 자신들이 살겠다고 에너지를 소비한다. 에너지는 모두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얻는다. 땅 속 화석연료 속에 묻혀 있는 탄소가 공기 중으로 나온다. 물 속에 녹아있는 탄소들이 공기 중으로 쌓인다. 지구 바깥으로 나가야 할 열이 나가지 않는다. 탄소가 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공기중의 탄소를 줄이는 방법이 유일하다. 화석연료를 태우는 모든 에너지원은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나무가 자라는 것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것이다. 제주에서 자라던 귤이 반도에서 자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위험천만 한 것이다.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던 고기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경고의 메시지다. 지구의 온도가 ’1도‘를 넘어 선 지금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매년 봄에 당도하는 황사먼지는 중국의 공해때문이 아니다. 빠로 탄소 때문이다. 지구가 더워졌기 때문이다. 초원이 사라지고, 극지방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며 북극곰이 사라지고, 허리케인이 많아지고 강력해지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지구가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다.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는 경고다. 선풍기 바람 앞에 있기에, 에어콘 찬 바람 앞에 있기 때문에 그 경고의 메세지를 느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무지한 것이고 무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7년 기준으로 7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그것도 추정치다. 정말 이 추정치가 추정오차의 상한치이길 기대한다. 의미심장하고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도표가 하나 있다. 1900을 기점으로. 산업혁명 이후를 기점으로 영국과 G7국가들은 경제성장률이 각각 72%와 65%가 증가했지만, 탄소배출량은 영국은 43% 감소했고 G7평균은 4%가 감소했다는 보고다. 우리는 경제규모의 성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비례적으로 증가해 왔다는 것이다. 우린 2017년 기준으로 1인당 13.8톤의 탄소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영국은 8.798톤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고,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돈을 벌면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실제 데이터가 보여준다.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다. 편법도 한계다. 돈으로 떼울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올 4월21일 기준의 온실가스배출권의 거래가가 4만500원이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온실가스배출량을 기분으로 하더라도 28조원이 든다. 코로나재난기금에 13조원 풀린 것을 가지고 난리법석인데...가만히 눈 뜨고 28조가 날아간다. 그 돈으로 온실가스배출을 줄이는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나 싶다.    


IPCC에서 기후변화 역전해법 (Plan Drawdown Solutions)을 내놓았다고 한다. 30가지의 대안이다. 지금부터 30년동안 (2020~2050), 총 1,576Gton의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있다는 목표다. 이제 공학이 나서야 할 때다. 과학이 ’앎‘을 제공하고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다면, 알게 된 문제를 해결해야한 책임은 공학이다. 공학은 조율이다. 최적을 조율하는 것이다.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공학이 아니다. 인류가 살아오며 해왔던 모든 궁리들이 공학이다. 공학은 항상 팽창하는 긴장을 다른 판으로 풀어내며 위기를 극복해왔다. 공학이 ’다른 판‘을 궁리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무지 속의 무례함과 함께 존재한다면,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데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학이 도전해야 할 일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인류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문제들이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지구차원의 planet optimization을 추구해야만 한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서 할 일이 아닌지 않는가. 


“손자님들! 죄송합니다.“            

성교수님께서 가연을 끈내시고 자리를 옮기신 후, 한 숨과 함께 토해내신 말씀이다. 손자들에게 물려 줄 위대한 반성의 선물과 실천을 시작해야 할 때이지만, 그 형언할 수 없는 무게를 느끼고 계심이다.  ##


침잠의 시간에 세상 구서구석의 고통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반성의 시간과 다음 행동의 방향타를 잡아주시려고 온 에너지를 다해주신 성단근 교수님께 자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