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도래하는 초연결시대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의 신기축을 탐색하는 새통사입니다.
이번 116차 새통사 모임은 최근 Tomasello 박사의 <A Natural History of Human Thinking>을 <생각의 기원>으로 번역해내신 이정원 박사님을 모시고 인류문명을 만들어 낸 생각의 기원에 대한 생각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정원 박사님은 ETRI에서 아주 특별한 분이십니다. 개인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갈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4차 산업혁명을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대전이 자랑하는 독서클럽 <백북스>의 이사로 활약하시고, ETRI 내의 <ETRI 독서클럽>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계신 분이고, 무엇보다도 재작년 알파고가 맹위를 떨칠 때, 알파고가 바둑을 깨우친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계신 분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정원 박사님을 짧은 시간 내에 설명을 다 해내기 어렵습니다. 하여, 간사는 ‘두 번 출근하는 남자’로 소개하곤 합니다. 남들과 비슷하게 퇴근을 해서 자신을 꼭 닮은 두 아들의 아버지 노릇할 것을 다한 후, 다시 출근해서 자신만을 위한 성장의 시간을 가지는 남자입니다. 방대한 독서량과 두 번 출근해서 가지는 끈기와 예리한 사유의 시간은 이정원 박사님을 항상 준비된 남자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사는 이 시대의 최고의 커뮤니케이터 중의 한사람임을 서슴없이 소개합니다.
책을 번역하는다는 것은 책을 직접 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거나 오히려 각자의 표현 양식의 차이 때문에 어려울 수 있는 작업으로 이해됩니다. 그것도 이제 갓 독자적인 <신경과학자>의 길을 내딛기 시작한 무명에게 세계적인 대가의 책을 번역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에도 이정원 박사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는 또 성공적으로 멋진 책을 만들어 냈다. 그냥 번역한 것이 아니라 토마셀로 박사의 섬세한 감각과 예리한 사유 세계에 감응해서 새로운 책을 써 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의 기원>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왜 특별한 동물인지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그런 동물 중의 하나로 남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정녕 특별한 동물인가?
-인간은 정녕 다른 동물들과 다른 특별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것이 없다는 어떻게 인간들만이 다른 동물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문명’을 이루고 사는 것일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세계적인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꾸준히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가? 하라리 뿐만 아니라 토마셀로 교수의 반대편에 서서 동물과 인간의 유사점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프란스 드 발> 교수도 있고, 언어도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스티븐 핑거> 교수도 계신다.
-<알파고>의 맹활약 덕분에 인간이 문명을 이루게 한 지능들이 인간만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침 조간 신문 아니 시시각각 떠는 해외의 인공지능 관련 소식들을 접하고 있으면 금방 인간들이 폼잡고 사는 시대는 금방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이라고 이야기하는 1차적인 감각지능들은 인공지능 앞에서 명함을 내놓기 힘들어 하고 있지 않는가. 전기만 주면 지치지 않고 공부하는 인공지능을 보고 있자면 이놈들의 끝은 과연 어딜까 하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뇌과학 공부를 조금만 해보면, 그런 불안감은 쉽게 던져버릴 수 있다. 인간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능적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여기에도 <생각의 기원>속에서는 뇌과학 책에서 보기 어려웠던 촘촘한 인간의 사유능력의 높은 계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의 기원>에서 말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재능은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마치 해마다 새로운 기능들로 잔뜩 무장한 스마트폰이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람과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차이를 알고 실제 운용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한 동네에서 한 무리로 살 던 어떤 존재들이 어떻게 수많은 종의 분화로 이루어졌는지를 이정원 박사님은 토마셀로 박사의 섬세한 감각과 예리한 사유와 지난한 끈기에 감응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2.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정원 박사님은 에둘러서 선배들을 꾸짖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아니, 이 땅의 과학기술자들의 배부름을 나무라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이 땅의 경제사회와 모든 인문학자들을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란 우리들의 ‘상상의 질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싶어하고 있음을 느낀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다. 생각의 시작은 기억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증거는 새로운 기억을 낳는다. 또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 세운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을 법한 지식인들이 <편견>의 두꺼운 안경을 모두 쓰고 있는 듯하다. 이정원 박사님의 글 한편을 읽어 보자.
-대전일보 [이정원의 문화산책]에서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네요. 우리가 알던 지식이 어떻게 틀릴 수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우리 교실에서 부드러운 미소와 친절한 설명을 맡고 있는 고원용 반장님의 대답이 머리를 때린다. "우리가 잘못 알았던 게 아니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거죠."
매주 금요일 빅 히스토리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우리는 요즘 인류의 진화를 공부하고 있다. 우주와 별, 태양계와 지구, 생명의 역사를 공부했던 6개월 동안에는 닐 타이슨의 '코스모스'를 주로 보았고 인류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EBS 다큐프라임 '인류의 생존' 2부작을 먼저 보았는데, 인류의 진화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에서도 EBS 다큐프라임을 고른 이유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배웠던 인류의 진화 계보는 폐기된 지 오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는 계보를 지금의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다. 교과서도 계속 바뀐다.
인간은 최소 24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단 하나의 종이 남아 있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기로 진행되지 않았고 복잡한 가지를 이루었으며, 뇌 용량은 작지만 도구와 불을 사용했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발견으로 그 계보는 더욱 복잡해졌다.
2003년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 플로레스의 리앙부아 동굴에서 새로운 종으로 보이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키가 1미터 정도로 몸집이 작고 머리의 크기는 현생 인류의 삼분의 일에 불과해서 '호빗'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설에서나 등장하던 '호빗'이 진짜로 있을 줄이야. '호빗'의 정체는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추가 발굴이 이어지면서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종으로 분류되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004년 네이처 논문에 의하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불과 1만 2000년 전까지도 살아 있었다. 3만 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도 현생 인류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종의 인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1만 년 전이면 꽤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2016년 4월 네이처에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멸종 연대를 수정하는 논문이 실렸다. 2004년 논문의 저자들이 참여한 연구였으니 개정판을 낸 셈이다. 과학자들은 리앙부아 동굴에서 발견된 유골 및 도구와 지층의 연대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멸종 시기를 5만 년 전으로 앞당겼다.
이 장면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지식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실상 마지막 '호빗'이 언제 죽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14년 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10년 넘게 가장 최근에 멸종한 인간 종이었다가 작년에 다시 그 자리를 네안데르탈인에게 넘겨줬다. 어떤 지식은 없었다가 생기며, 있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도 태어나고 죽는다. 어떤 특정 지식의 신뢰도를 정량화 할 수 있다면 지식의 신뢰도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성장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식은 빨리 자라고 어떤 지식은 대기만성일 것이다. 스케일을 키우면 지식의 생몰연대표를 만들 수도 있겠다.
지식이 태어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과학 명제는 '현재까지의 증거로 과학자들이 합의한 바에 따르면' 이라는 주석이 생략된 채로 말해진다. 새로운 증거가 더해지면 이론은 수정될 것이다.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의 정오표와 개정판을 틈나는 대로 확인하자. 지금은 맞지만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그렇다. 항상 같은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이 일찍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같지 않는가. 지식인들이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는가?
3. 너는 훗날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You will be like God.’ 세계의 베스트셀러 성경의 창세기에 있는 말이다. 왜 이런 말씀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냥 그 존재가 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왔기 때문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간사는 요즘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정말 대형 유인원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들이 과연 몸, 즉 하드웨어의 차이가 있었을까? 간 혹 주변에서도 고대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 변한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리라.
-BC 3,500년경은 인류에게 특별한 시기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인류의 4대 문명이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유전학적으로 5백만년전쯤에 대형유인원과 분화되고 나서 정말 엄청난 시간이 흐른 후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또 어떤 계기로 이런 분화가 시작된 것일까? 이런 질문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등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기본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창세기의 ‘You will be like God.’라는 말이 그냥 인간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일까?
-<생각의 기원>에서 토마셀로 박사가 말하는 ‘지향점 공유 가설’이 정말 의미심장하다. 종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축적의 방법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우연한 기회에 나의 시점에서 타인의 시점으로 옮기며 느꼈던 생각 하나를 놓치지 않고 ’엇?!‘하며 그 생각을 붙들었던 그 존재, 그 생각을 재연해고자 노력했던 그 존재, 아주 작은 경험을 재연해내고 타자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던 존재.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존재. 그 존재들이 무리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1인칭 관찰이 2인칭 관찰과 3인칭 관찰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관점‘의 탄생, 관점이 일반화된 ’객관‘의 탄생은 인간에게 ’상상의 질서‘라는 지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축적의 방법이다. 그런 일련의 아주 작은 축적들이 나가 아닌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각자가 쌓은 작은 축적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수단의 탄생은 폭발적인 축적의 증가를 이루어 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네트워크의 이론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인류는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준 하드웨어인 몸 속의 잠자고 있는 기능들을 하나씩 하나씩 깨워 작동을 시켜가고 있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워 봄직하다. 안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에 문명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인간들은 계급이 있었음을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꿈을 꾸는 자가 있었고,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생각해내는 자가 있었고, 그 방법론을 실천하는 자가 있었다. 물질세계가 있었고 물질세계를 운영하는 운영체계가 있었고 그 운영하는 스타일을 정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흔적들이다.
-기계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기계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준 하드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하나씩 하나씩 터득해가면 그 때에서야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SNS에서 상에서 노골적인 편가르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토마셀로 박사의 ‘지향점 공유가설’에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청중으로부터 나왔다. 이 질문에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인간의 종의 분화현상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또 다른 편견이나 아집이 스스로를 집단지향성을 터득한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번 집단 지향성에 이른 동물이 다시 개인지향성만을 가지는 동물로 추락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퇴화되기 마련이기에.
-이정원 박사님은 우리 모두가 작은 공동의 지향성을 체험하는 훈련부터 해보자는 제안을 하신다. 아마도 대덕연구단지의 심각한 SILO문화가 집단지향성에 대한 인지기능의 퇴화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금 일본 천문학계의 한 화두가 머리를 스친다. ‘유전공학의 가설의 입장에서, 그 어떤 존재가 물에서 살다가 육지 위에 살고 싶어서 동물이라는 몸을 빌었다면, 그 존재가 우주에 살고 싶을 때, 어떤 몸이 필요할까?’ 토마셀로 박사는 무슨 답을 주실까 궁금해진다. ##
마치 세상의 이치를 몸으로 깨우친 듯이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준비하고 축적해 나가시는 이정원 박사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경과학자로서 내딛는 첫걸음이 훗날 또 하나의 위대한 일가를 이루시길 함께 응원 드리고 싶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도래하는 초연결시대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의 신기축을 탐색하는 새통사입니다.
이번 116차 새통사 모임은 최근 Tomasello 박사의 <A Natural History of Human Thinking>을 <생각의 기원>으로 번역해내신 이정원 박사님을 모시고 인류문명을 만들어 낸 생각의 기원에 대한 생각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정원 박사님은 ETRI에서 아주 특별한 분이십니다. 개인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갈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4차 산업혁명을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대전이 자랑하는 독서클럽 <백북스>의 이사로 활약하시고, ETRI 내의 <ETRI 독서클럽>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계신 분이고, 무엇보다도 재작년 알파고가 맹위를 떨칠 때, 알파고가 바둑을 깨우친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계신 분이다. 이런 식으로는 이정원 박사님을 짧은 시간 내에 설명을 다 해내기 어렵습니다. 하여, 간사는 ‘두 번 출근하는 남자’로 소개하곤 합니다. 남들과 비슷하게 퇴근을 해서 자신을 꼭 닮은 두 아들의 아버지 노릇할 것을 다한 후, 다시 출근해서 자신만을 위한 성장의 시간을 가지는 남자입니다. 방대한 독서량과 두 번 출근해서 가지는 끈기와 예리한 사유의 시간은 이정원 박사님을 항상 준비된 남자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사는 이 시대의 최고의 커뮤니케이터 중의 한사람임을 서슴없이 소개합니다.
책을 번역하는다는 것은 책을 직접 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거나 오히려 각자의 표현 양식의 차이 때문에 어려울 수 있는 작업으로 이해됩니다. 그것도 이제 갓 독자적인 <신경과학자>의 길을 내딛기 시작한 무명에게 세계적인 대가의 책을 번역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에도 이정원 박사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는 또 성공적으로 멋진 책을 만들어 냈다. 그냥 번역한 것이 아니라 토마셀로 박사의 섬세한 감각과 예리한 사유 세계에 감응해서 새로운 책을 써 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의 기원>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왜 특별한 동물인지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그런 동물 중의 하나로 남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정녕 특별한 동물인가?
-인간은 정녕 다른 동물들과 다른 특별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것이 없다는 어떻게 인간들만이 다른 동물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문명’을 이루고 사는 것일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세계적인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꾸준히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가? 하라리 뿐만 아니라 토마셀로 교수의 반대편에 서서 동물과 인간의 유사점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프란스 드 발> 교수도 있고, 언어도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스티븐 핑거> 교수도 계신다.
-<알파고>의 맹활약 덕분에 인간이 문명을 이루게 한 지능들이 인간만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침 조간 신문 아니 시시각각 떠는 해외의 인공지능 관련 소식들을 접하고 있으면 금방 인간들이 폼잡고 사는 시대는 금방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이라고 이야기하는 1차적인 감각지능들은 인공지능 앞에서 명함을 내놓기 힘들어 하고 있지 않는가. 전기만 주면 지치지 않고 공부하는 인공지능을 보고 있자면 이놈들의 끝은 과연 어딜까 하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뇌과학 공부를 조금만 해보면, 그런 불안감은 쉽게 던져버릴 수 있다. 인간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능적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여기에도 <생각의 기원>속에서는 뇌과학 책에서 보기 어려웠던 촘촘한 인간의 사유능력의 높은 계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의 기원>에서 말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재능은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마치 해마다 새로운 기능들로 잔뜩 무장한 스마트폰이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람과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차이를 알고 실제 운용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한 동네에서 한 무리로 살 던 어떤 존재들이 어떻게 수많은 종의 분화로 이루어졌는지를 이정원 박사님은 토마셀로 박사의 섬세한 감각과 예리한 사유와 지난한 끈기에 감응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2.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정원 박사님은 에둘러서 선배들을 꾸짖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아니, 이 땅의 과학기술자들의 배부름을 나무라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이 땅의 경제사회와 모든 인문학자들을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란 우리들의 ‘상상의 질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싶어하고 있음을 느낀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다. 생각의 시작은 기억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증거는 새로운 기억을 낳는다. 또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 세운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을 법한 지식인들이 <편견>의 두꺼운 안경을 모두 쓰고 있는 듯하다. 이정원 박사님의 글 한편을 읽어 보자.
-대전일보 [이정원의 문화산책]에서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네요. 우리가 알던 지식이 어떻게 틀릴 수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우리 교실에서 부드러운 미소와 친절한 설명을 맡고 있는 고원용 반장님의 대답이 머리를 때린다. "우리가 잘못 알았던 게 아니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거죠."
매주 금요일 빅 히스토리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우리는 요즘 인류의 진화를 공부하고 있다. 우주와 별, 태양계와 지구, 생명의 역사를 공부했던 6개월 동안에는 닐 타이슨의 '코스모스'를 주로 보았고 인류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EBS 다큐프라임 '인류의 생존' 2부작을 먼저 보았는데, 인류의 진화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에서도 EBS 다큐프라임을 고른 이유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배웠던 인류의 진화 계보는 폐기된 지 오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는 계보를 지금의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다. 교과서도 계속 바뀐다.
인간은 최소 24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단 하나의 종이 남아 있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기로 진행되지 않았고 복잡한 가지를 이루었으며, 뇌 용량은 작지만 도구와 불을 사용했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발견으로 그 계보는 더욱 복잡해졌다.
2003년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 플로레스의 리앙부아 동굴에서 새로운 종으로 보이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키가 1미터 정도로 몸집이 작고 머리의 크기는 현생 인류의 삼분의 일에 불과해서 '호빗'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설에서나 등장하던 '호빗'이 진짜로 있을 줄이야. '호빗'의 정체는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추가 발굴이 이어지면서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종으로 분류되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004년 네이처 논문에 의하면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불과 1만 2000년 전까지도 살아 있었다. 3만 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도 현생 인류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종의 인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1만 년 전이면 꽤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2016년 4월 네이처에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멸종 연대를 수정하는 논문이 실렸다. 2004년 논문의 저자들이 참여한 연구였으니 개정판을 낸 셈이다. 과학자들은 리앙부아 동굴에서 발견된 유골 및 도구와 지층의 연대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멸종 시기를 5만 년 전으로 앞당겼다.
이 장면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지식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실상 마지막 '호빗'이 언제 죽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14년 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10년 넘게 가장 최근에 멸종한 인간 종이었다가 작년에 다시 그 자리를 네안데르탈인에게 넘겨줬다. 어떤 지식은 없었다가 생기며, 있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도 태어나고 죽는다. 어떤 특정 지식의 신뢰도를 정량화 할 수 있다면 지식의 신뢰도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성장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식은 빨리 자라고 어떤 지식은 대기만성일 것이다. 스케일을 키우면 지식의 생몰연대표를 만들 수도 있겠다.
지식이 태어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과학 명제는 '현재까지의 증거로 과학자들이 합의한 바에 따르면' 이라는 주석이 생략된 채로 말해진다. 새로운 증거가 더해지면 이론은 수정될 것이다.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의 정오표와 개정판을 틈나는 대로 확인하자. 지금은 맞지만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그렇다. 항상 같은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이 일찍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같지 않는가. 지식인들이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는가?
3. 너는 훗날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You will be like God.’ 세계의 베스트셀러 성경의 창세기에 있는 말이다. 왜 이런 말씀이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냥 그 존재가 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왔기 때문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간사는 요즘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정말 대형 유인원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들이 과연 몸, 즉 하드웨어의 차이가 있었을까? 간 혹 주변에서도 고대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 변한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리라.
-BC 3,500년경은 인류에게 특별한 시기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인류의 4대 문명이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유전학적으로 5백만년전쯤에 대형유인원과 분화되고 나서 정말 엄청난 시간이 흐른 후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또 어떤 계기로 이런 분화가 시작된 것일까? 이런 질문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등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기본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창세기의 ‘You will be like God.’라는 말이 그냥 인간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일까?
-<생각의 기원>에서 토마셀로 박사가 말하는 ‘지향점 공유 가설’이 정말 의미심장하다. 종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축적의 방법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우연한 기회에 나의 시점에서 타인의 시점으로 옮기며 느꼈던 생각 하나를 놓치지 않고 ’엇?!‘하며 그 생각을 붙들었던 그 존재, 그 생각을 재연해고자 노력했던 그 존재, 아주 작은 경험을 재연해내고 타자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던 존재.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존재. 그 존재들이 무리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1인칭 관찰이 2인칭 관찰과 3인칭 관찰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관점‘의 탄생, 관점이 일반화된 ’객관‘의 탄생은 인간에게 ’상상의 질서‘라는 지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축적의 방법이다. 그런 일련의 아주 작은 축적들이 나가 아닌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각자가 쌓은 작은 축적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수단의 탄생은 폭발적인 축적의 증가를 이루어 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네트워크의 이론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인류는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준 하드웨어인 몸 속의 잠자고 있는 기능들을 하나씩 하나씩 깨워 작동을 시켜가고 있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워 봄직하다. 안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에 문명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인간들은 계급이 있었음을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꿈을 꾸는 자가 있었고,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생각해내는 자가 있었고, 그 방법론을 실천하는 자가 있었다. 물질세계가 있었고 물질세계를 운영하는 운영체계가 있었고 그 운영하는 스타일을 정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흔적들이다.
-기계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기계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준 하드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하나씩 하나씩 터득해가면 그 때에서야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SNS에서 상에서 노골적인 편가르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토마셀로 박사의 ‘지향점 공유가설’에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청중으로부터 나왔다. 이 질문에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인간의 종의 분화현상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또 다른 편견이나 아집이 스스로를 집단지향성을 터득한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번 집단 지향성에 이른 동물이 다시 개인지향성만을 가지는 동물로 추락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퇴화되기 마련이기에.
-이정원 박사님은 우리 모두가 작은 공동의 지향성을 체험하는 훈련부터 해보자는 제안을 하신다. 아마도 대덕연구단지의 심각한 SILO문화가 집단지향성에 대한 인지기능의 퇴화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금 일본 천문학계의 한 화두가 머리를 스친다. ‘유전공학의 가설의 입장에서, 그 어떤 존재가 물에서 살다가 육지 위에 살고 싶어서 동물이라는 몸을 빌었다면, 그 존재가 우주에 살고 싶을 때, 어떤 몸이 필요할까?’ 토마셀로 박사는 무슨 답을 주실까 궁금해진다. ##
마치 세상의 이치를 몸으로 깨우친 듯이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준비하고 축적해 나가시는 이정원 박사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경과학자로서 내딛는 첫걸음이 훗날 또 하나의 위대한 일가를 이루시길 함께 응원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