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강연모음

170602 제88차_ 변하는 세계, 불변의 세계 (최완 박사, ET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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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도래하는 초연결시대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의 신기축을 탐색하는 새통사입니다. 

 

이번 새통사 88차 모임은 무봉 (無峰) 최완 박사님을 모시고 불교적 세계관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삶의 방법론에 대한 생각나누기를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를 살펴보는 시각은 정말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ETRI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빅히스토리 학습프로그램에서는 137억년의 우주진화역사를 통해서 우주와 자연과 우리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조망해볼 수 있다면, 오늘 무봉과 함께하는 불교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우리와 우리의 삶에 대한 사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른 관점에서 많은 위안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 불교적 가설 : 불변의 세계, 영혼의 세계, 생물체의 세계

-불교에서는 크게 변화하는 세계와 변화하지 않는 세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물질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샘영체), 성주괴공(우주만물), 생주미멸(생각)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고, 이러하기 떄문에 이것을 ‘실체가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無끊라 쓴다. 우주 또한 빅뱅으로 시작하여 언젠가는 다시 태초의 균형상태로 돌아가고 또다른 빅뱅을 시작하는 순환계를 갖는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무생물체도 그러하고 생물체도 그러하다. 우리 생명체의 수명이 우주의 그것과 비교해서 너무나 짧기 때문에 우주의 성주괴공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우주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변화하는 세계의 한 부분이다. 

-그 변화하는 세계에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과 같은 존재, 즉 영혼들의 세계가 있다고 가정한다(이것은 순전히 우리식 표현법이다). 이 세계에서는 철저한 힘의 는리만 존재한다고 한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성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새로운 성장을 위한 생명체 세계로의 환생과 되돌아감만이 존재한다. 인간세계에도 감옥이 있지만 이 세계에도 인간세계에서 지은 지를 씻는 지옥이 있는 곳이 이 세계다.

-생물체의 세계는 생물체의 유한성이 존재하는 세계. 뭔가 참아내야만 하는 인내의 세계다. 영혼의 자유로움을 가두는 유한성의 세계다. 그러나 이 유한의 세계에서만이 불변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유한한 답답함이 있지만 또 한편 무한의 세계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는 세계관이다. 묘한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


2. 왜 태어나는가?

-생명체로 인간으로 왜 태어나느냐는 불교적 사설에 그 답이 숨겨져 있다. 그 불변의 세계에 어떤 희열이 있고 어떤 행복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인간이 느끼는 모든 고통은 없다고 가정하고 엄청난 매력이 그 속에 숨어 있기에 모든 영혼은 그 불변의 세계로 가지 못해서 항상 걱정이다. 

-생명체의 세계로 영혼의 이동은 말 그대로 수양이다. 수양의 본질이 뭔지는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수양은 쉽게 참고 견뎌내며 자신을 닦는 것이다. 보는 것도 유한하고 듣는 것도 유한하고 느끼는 것도 유한하고 이해하는 것도 유한하고 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이 유한한 인간 속에 신공의 영혼들이 갇히는 것이 불교적 가설 차원에서의 생명 탄생의 의미다.

-어떤 수양을 하느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명경과 같은 본래심 위에 허상과 같은 마음, 즉 가짜의 마음이 더하여 인간의 의식을 만드는데, 수양은 이 가심을 제거하고 본래심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수양의 목표다. 결국 영혼이 이 의식을 가지고 것이고 영혼이 인간의 유한성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심에 독립적인 상태에 이르는 것이 수양의 목표다. 미처 수양을 다하기 전에 인간의 생명이 다하면, 그 수준으로 영혼의 세계로 간다. 

-인간의 마음, 가심은 희한하게 자신을 담고 있는 몸을 자신으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고, 모든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이 시간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시간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것을 베이즈이론으로 인간의 생각에 대한 지식모형을 만들었고, 지금 한참 유행인 Deep Learning의 인공지능이 이러한 동작 메카니즘을 흉내내고 있는 셈이다. 

-불교적 가설은 이런 가심이 다 사라지면 본래심이 드러난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도 결국 가심이 본래심을 가리고 있음을 이야기 하는 좋은 사례다. 


3,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이러한 불교적 가설은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명쾌한 논리를 제공한다. 끊임없이 가심을 제거하는 수양을 하는 것이 불교적 가설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바른 방법이다. 가심을 열심히 뿌리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심으로 혼란을 겪지 않게 수양하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가심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인연이 수많은 가심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업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가심을 제거한다는 의미가 가심을 피하고 회피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분심으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금방 참지 못하는 현상을 수없이 보이는 것이 우리다. 끊임없는 반복훈련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훈련할 수 있는 장으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알다시피, 생명체의 세계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고 삶이 안전과 안정이 보장이 되질 않고 만나고 헤어지는 이별의 아픔이 있는 세상이다. 이런 다양한 가심을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시켜서 이겨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어쩌면 제대로 된 수양의 끝이 아닌가 싶다. 내 것을 내주고도 내준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경쟁에서 졌으나 패배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등등...말그대로 쿨한 평정심이다. 

-열심히 살면서 수많은 평정심을 시험받는 훈련이 곧 수양의 최선의 길이다. 


4. 가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가심을 제어할 수 있다는 능력은 곧 가심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된다고 한다. 가심을 만들어 내는 세상은 우리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있으라 하면 있게 되는 그런 세상을 말한다. 

-있으라 하는 상상력이 있으면 그것을 있게 하는 세상의 일부를 우리는 맛보고 있다. 디지털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심의 상상력대로 컴퓨터 코드가 물질세상을 탄생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세상의 일부가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한다. 영혼의 세계에서나 존재할 법한 엄청난 반응속도가 물질세계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로 말이다. 상상력이 물질세상을 있게 한 것이 이것뿐만이 아닌 것을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생명체를 물리적 공간에 존재케 한 상상력의 표현의 실체가 mRNA다. 생명을 만들 수 있는 DNA라는 Primitive code가 있고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상력이 mRNA라는 코드로 표현되어 그것에 따라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마치 3D프린터가 인간 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우주는 어떠한가? 오늘날 우주를 이렇게 한 상상력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 같다. 빛이 생기고 물질이 생기고 광물이 생기고 행성이 생기고 생명체가 생기고 하는 일련의 변화에는 상상력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증거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코드들이다. 이것은 도대체 누가 상상하는 것일까?

-다시, 디지털 세계로 돌아가 보면, 인간들이 디지털 기술을 만들어 내어 상상한 대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불교적 가설 관점에서 보면, 굳이 인간이 가심을 이겨내려고 할 필요없이 가심을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5.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인간들아, 너희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야!’라고. 아마도 유발 하라리는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인간들이 잘나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존재의 상상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금 인간세계에 벌어지는 많은 현상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물질세계에 불변의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교적 가설에서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세상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인간들의 관점에서는 분명 불변의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발 하라리도 이야기한다. 인간들이 풀어야 하는 과제는 <기근, 질병, 전쟁>에서 <불멸, 행복, 신공>이 되었다고.... 더 이상 인간들은 어떻게 편안하게 먹고 살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들은 어떻게 죽지않고 행복하고 신나게 살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며 사는 세상으로 판이 바뀌었다.

-인간들은, 아니 불교적 가설에서 이야기 하면 영혼들은, 유기체적 몸에 자신을 가두기 보다는 비유기체적 몸에 자신을 넣어 죽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죽지않고 물질세상에 머물면서 좀 더 많은 수양의 시간을 확보하고 불변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꾀가 생긴 것이 아닐까? 아니면 물질세계에 와 있는 영혼들이 윤회하는 영혼들과는 전혀 달리 비유기체적 몸에 영혼을 담고 사는 <로보 사피엔스>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로보 사피엔스>는 어디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것과 유기체적 연결을 꿈꾸는 <로보 사피엔스>는 본래심을 얻었다고 자평하지 않을까?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새로운 인류 <호모 데우스>를 말한다. 인공지능의 고도의 발전으로 인간이 초연결적 존재인 새로운 인류가 되는 <호모 데우스>를 말한다. 지금 상상해보는 <로보 사피엔스>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관점에서의 진화인 <호모 데우스>와 영혼의 관점에서 진화시킨 <로보 사피엔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 미래에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와 로보 사피엔스가 공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ㅎㅎ ## 


태어남과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게 해주고 불교적 가설의 관점에서 또 다시 디지털 세계와의 새로운 상상의 만남을 제공해주신 무봉(無峰) 최완 박사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항상 멋진 시간 함께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