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통사 (http://insight.kr) 시즌13-210차 모임에는 16개 언어를 넘나드는 번역가 신견식 (Waga Jabal Kyonshik)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다.
시즌13을 시작하며 새통사를 맡은 새로운 운영진(박동욱 부장, 김보성 대표, 김미애 실장, 서윤신 대표, 방용환 대표)들의 야심찬 도전을 선보이는 첫날이다. 6년간 이어 온 금요일 오후시간대에서 파격적으로 월요일 밤시간대로 옮기고, 장소도 ETRI에서 신성동의 커뮤니티들의 카페를 지향하는 “8US” (개인적으로는 ‘무한연결의 우리’라는 뜻으로 풀고 싶다.)로 옮겼다. 국가보안 상의 문제로, 평상 시 출입이 제한되는 ETRI를 떠나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카페로 이동한 것이다. 새통사가 바라는 더욱 빈번한 만남과 부딪힘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운영진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이 주는 낯설고 설레는 느낌에 시즌13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조촐한 식전행사의 시간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어렵게 모신 언어의 귀재 신견식 선생님의 강연도 귀에 잘 들어오질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너무 좋았는가 보다. ^^* 신 운영진을 격려해주시기 위해, 엄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여러 회원님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 숨길 수 없는 시간이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1.
신견식 선생은 15개 언어를 익히고 25개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번역가이시다. 그 중에서도 16개 언어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는 언어의 수라고 말씀하신다. 산전수전을 겪고 난 다음, 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준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경계인이라고 부른다. 신 선생은 언어 경계인이신 셈이다. 자신을 어도락가(語道樂家)라고 소개했다. 맛에 관한 식도락가에 견주어 붙여본 것이란다. 식도락의 경지는 식을 배고픔을 해결하는 차원을 지나고 미식의 단계를 넘어 음식에서 禮와 道와 樂을 추구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어도락가’도 그저 소통을 위한 말이 아니라 말 속의 예와 도와 락을 추구하는 경지라고 풀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신 선생은 25개 언어를 넘나든다고 하니, 지구 생명 역사 속에 발현한 거의 모든 언어 속에 숨겨진 비밀을 혼자 즐기시는 사람이겠다. 그저 상상만 해도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인다. 언어라는 얼굴 뒤에 가려진 수많은 시간들과 공간들과 사물들과 관계들과 그리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말로 다 셀 수 없을 사태 속에서 태어나고 쓰여지고 다듬어지고 퍼지고 변용되고 진화되는 과정들의 비밀의 고리를 찾아 나서는 어도락가의 희열을 어렴풋이 상상해보며, 부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강연이 끝나고 ‘넘 얄밉다’는 표현을 했다. 자신의 그 즐거움을 대수롭지 않고 말하는 것도 얄밉고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는 말에도 얄밉기는 마찬가지였기에 ^^* 강연이 끝나고 찻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며 티타임을 가질 때, 조상 중에 언어의 달인이라고 알려진 신숙주 선생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문충 신숙주 선생과는 18대 정도를 내려왔다고 확인해 주신다. 그럼 그렇지....강연 중에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즐겁다, 즐긴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해주셨다. 문충 선생과 그 즐김이라는 말 때문에 자연스럽게 뇌과학적인 차원에서 신 선생을 추적해보고 싶어진다. 뭘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은 뭘 접하는 것이 익숙함을 지나 그 익숙함 속에서 좋았던 기억이 응축된 상태가 즐겁다는 느낌이 드는 상태이니, 신 선생의 유전자 속에 누적된 언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에 대한 응축의 층위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움은 질투심과도 동격이다. 호기심과도 동격이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발굴해내는 힘이다. 그 힘이 감각의 문을 붙들고 관찰을 하게하고 분별하게 하고, 그 분별이 수많은 것들과의 또 다른 관계를 불러 일으키며 또 다른 체험을 낳고 경험을 축적하게 하는 가운데 우리를 확장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옛날부터 신 선생의 조상들이 역관의 역할을 많이 담당했다면, 자연스럽게 나라 차원의 다양한 사실들을 접하는 경험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니,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신 선생의 언어의 연결망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하겠다 싶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데 잘 굴러가는 차가 없듯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꾸준한 루틴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학창시절에는 밥 한 끼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할 정도로 다양한 언어에 천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언어의 귀재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대답이 가장 현명한 대답인 것 같다. 신 선생의 대답이 그러했다.
2.
번역가들의 삶이 과학자들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자연 속에 숨겨진 비밀 법칙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것이, 마치 자연을 각자의 시선으로 번역하는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관찰을 통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그 증거들 속에 숨어 있을 규칙성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귀납적으로 증명하며 자연을 하나하나 번역해낸다. 증거들 속에 숨어 있는 규칙성의 가설은 언어 속에 숨어있는 형식들과 같다. 언어는 상호적인 것이라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인지하는 공통의 형식의 형식이 있다. 번역가들이 번역을 하는 행위는 과학자들이 자연 속에 숨겨진 형식을 자신의 학문적 형식으로 번역하듯이, 언어문화 속의 형식과 형식간의 짝 맞추기다. 과학이라는 번역에도 보는 시각에 따라 패러다임이 존재하듯이, 번역에도 번역가의 삶의 이력에 따라 번역의 맛이 결정될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형식은 새롭게 정의하여 만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번역가들과 과학자들의 삶이 닮았다. 서로 다른 형식을 알면 알수록 번역되는 세계의 확장은 더욱 빨라 질 것은 자명하다. 다양한 형식들은 책 속에도 있지만,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수많은 글자들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의 머리 속 언어 형식을 많이 알면 알수록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유로워지며 관계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기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언어는 사람들이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언어를 통해서 기억을 통해서 극복해 낼 가능성을 제공한다. 사람의 기억이 항상 같을 수 없는 것이기에 번역가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옛 모습은 다이내믹 그대로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난한 과정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멋진 여행과 같은 즐거움의 여정일 것이다. 딱 그 차이. 그 차이에서 사람들은 갈리기 시작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나는 ‘그 차이’라는 지점에서는 언제나 언어의 분화가 있을 것이 자명하다. 신 선생의 책 속에서 검은 것을 뜻하는 영어의 블랙과 하얀 것을 뜻하는 프랑스의 블랑의 말의 뿌리가 같다는 이야기를 만난다. 이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경계’를 떠올린다. 밝고 흰 것의 반대편에 검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경계’. 빅뱅 이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양’이 존재하는 저 편에 ‘음’이 존재하는 방식. 양과 음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 언어의 가지치기에 인간에게 내재된 ‘구분하는 능력’을 읽을 수 있다. 경계라는 담장 위를 오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경계의 바깥을 보고, 비록 그 경계 바깥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경계의 안쪽과 바같쪽과 경계의 담장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오로지 경계라는 당장 위에 서본 자와 서보지 않는 자들의 딱 그 차이에서 비롯된다. 딱 그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매일 같은 것을 보고 매일 같은 것을 경험하지만, 또 다른 한사람은 동시에 3가지를 알고 또 다른 세가지를 또 다른 세가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신 선생의 어도락은 바로 그런 수많은 담장 위의 놀이이겠다 싶다. 마지막 질문으로 번역하시고 싶은 책을 여쭈었다. 스웨덴 작가 빌헬름 모베리가 쓴 18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스웨덴 사람들을 다룬 4부작 서사시 <이민>이라는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하신다. 이주한지 100년이 지난 후 또 10년에 걸쳐 저술한 책이란다. 신 선생의 사유의 고유성이 기대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 선생의 일상이 ‘Migration’이 아닐까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다듬어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경계 바깥으로의 migration이 아니겠나 싶다.
3.
디지털의 첨단기술들을 가까이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 동네인지라, 자연스럽게 번역가의 능력과 기계번역의 능력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훗날 기계번역이 번역가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번역가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렇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의 잉태를 통한 수많은 추상기계들을 앞세울 수 있게 됨으로써 오늘의 인류가 존재하듯이, 지구생명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깨우친 ‘알아가는 능력’을 기계에 이식이 가능하다면, 기계에도 언어의 잉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언어가 인류에게 종속된 것이 아닌 또 하나의 추상기계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멈추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 당연하다.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는 층위들이 정의되고 만 다음에라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계들이 언어를 배우는 속도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를 것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자지 않고, 싫증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따라 붙으면, 기계가 인간의 감각과 운동과 관련한 언어의 습득을 마스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의 언어는 이미 저만치 추상의 세계로 확장되어 있다. 추상의 언어 세계를 배우기 위해서는 추상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반응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직 기계는 인간의 추상 언어에 대한 좋음과 싫음을 스스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실함수가 정의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직 기계학습이 학습을 할 수는 없다. 인류에게 발견되는 그러한 손실함수는 또한 수많은 층위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직 기계는 인간이 뱉어 낸 언어들을 배운다. 기계들에게 ‘구분하고 이름 붙이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인간들의 배설물을 분석하고 배울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migration 해가는 존재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데이터를 생성해놓고 그 데이터들이 전부인양,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그들이 가지지 못하는 ‘욕망’이 있음을. 아직 우리는 그 욕망의 ‘최소 단위’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세상의 무한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5개 언어를 서핑하는 어도락가 신견식 선생께서도 동의해 주지 않을까 싶다. 신 선생께서도 언어를 계속해서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 백을 같이 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기계가 왜 변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어도락가의 머리 속에 꿈틀거리는 언어의 연결망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을까.....누가 이에 대한 과학적 반론이 있으면 참 좋겠다. ^^*
ETRI 이순석
새통사 (http://insight.kr) 시즌13-210차 모임에는 16개 언어를 넘나드는 번역가 신견식 (Waga Jabal Kyonshik)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다.
시즌13을 시작하며 새통사를 맡은 새로운 운영진(박동욱 부장, 김보성 대표, 김미애 실장, 서윤신 대표, 방용환 대표)들의 야심찬 도전을 선보이는 첫날이다. 6년간 이어 온 금요일 오후시간대에서 파격적으로 월요일 밤시간대로 옮기고, 장소도 ETRI에서 신성동의 커뮤니티들의 카페를 지향하는 “8US” (개인적으로는 ‘무한연결의 우리’라는 뜻으로 풀고 싶다.)로 옮겼다. 국가보안 상의 문제로, 평상 시 출입이 제한되는 ETRI를 떠나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카페로 이동한 것이다. 새통사가 바라는 더욱 빈번한 만남과 부딪힘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운영진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이 주는 낯설고 설레는 느낌에 시즌13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조촐한 식전행사의 시간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어렵게 모신 언어의 귀재 신견식 선생님의 강연도 귀에 잘 들어오질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너무 좋았는가 보다. ^^* 신 운영진을 격려해주시기 위해, 엄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여러 회원님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 숨길 수 없는 시간이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1.
신견식 선생은 15개 언어를 익히고 25개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번역가이시다. 그 중에서도 16개 언어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는 언어의 수라고 말씀하신다. 산전수전을 겪고 난 다음, 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준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경계인이라고 부른다. 신 선생은 언어 경계인이신 셈이다. 자신을 어도락가(語道樂家)라고 소개했다. 맛에 관한 식도락가에 견주어 붙여본 것이란다. 식도락의 경지는 식을 배고픔을 해결하는 차원을 지나고 미식의 단계를 넘어 음식에서 禮와 道와 樂을 추구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어도락가’도 그저 소통을 위한 말이 아니라 말 속의 예와 도와 락을 추구하는 경지라고 풀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신 선생은 25개 언어를 넘나든다고 하니, 지구 생명 역사 속에 발현한 거의 모든 언어 속에 숨겨진 비밀을 혼자 즐기시는 사람이겠다. 그저 상상만 해도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인다. 언어라는 얼굴 뒤에 가려진 수많은 시간들과 공간들과 사물들과 관계들과 그리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말로 다 셀 수 없을 사태 속에서 태어나고 쓰여지고 다듬어지고 퍼지고 변용되고 진화되는 과정들의 비밀의 고리를 찾아 나서는 어도락가의 희열을 어렴풋이 상상해보며, 부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강연이 끝나고 ‘넘 얄밉다’는 표현을 했다. 자신의 그 즐거움을 대수롭지 않고 말하는 것도 얄밉고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는 말에도 얄밉기는 마찬가지였기에 ^^* 강연이 끝나고 찻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며 티타임을 가질 때, 조상 중에 언어의 달인이라고 알려진 신숙주 선생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문충 신숙주 선생과는 18대 정도를 내려왔다고 확인해 주신다. 그럼 그렇지....강연 중에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즐겁다, 즐긴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해주셨다. 문충 선생과 그 즐김이라는 말 때문에 자연스럽게 뇌과학적인 차원에서 신 선생을 추적해보고 싶어진다. 뭘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은 뭘 접하는 것이 익숙함을 지나 그 익숙함 속에서 좋았던 기억이 응축된 상태가 즐겁다는 느낌이 드는 상태이니, 신 선생의 유전자 속에 누적된 언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에 대한 응축의 층위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움은 질투심과도 동격이다. 호기심과도 동격이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발굴해내는 힘이다. 그 힘이 감각의 문을 붙들고 관찰을 하게하고 분별하게 하고, 그 분별이 수많은 것들과의 또 다른 관계를 불러 일으키며 또 다른 체험을 낳고 경험을 축적하게 하는 가운데 우리를 확장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옛날부터 신 선생의 조상들이 역관의 역할을 많이 담당했다면, 자연스럽게 나라 차원의 다양한 사실들을 접하는 경험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니,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신 선생의 언어의 연결망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하겠다 싶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데 잘 굴러가는 차가 없듯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꾸준한 루틴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학창시절에는 밥 한 끼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할 정도로 다양한 언어에 천착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언어의 귀재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대답이 가장 현명한 대답인 것 같다. 신 선생의 대답이 그러했다.
2.
번역가들의 삶이 과학자들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자연 속에 숨겨진 비밀 법칙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것이, 마치 자연을 각자의 시선으로 번역하는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관찰을 통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그 증거들 속에 숨어 있을 규칙성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귀납적으로 증명하며 자연을 하나하나 번역해낸다. 증거들 속에 숨어 있는 규칙성의 가설은 언어 속에 숨어있는 형식들과 같다. 언어는 상호적인 것이라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인지하는 공통의 형식의 형식이 있다. 번역가들이 번역을 하는 행위는 과학자들이 자연 속에 숨겨진 형식을 자신의 학문적 형식으로 번역하듯이, 언어문화 속의 형식과 형식간의 짝 맞추기다. 과학이라는 번역에도 보는 시각에 따라 패러다임이 존재하듯이, 번역에도 번역가의 삶의 이력에 따라 번역의 맛이 결정될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형식은 새롭게 정의하여 만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번역가들과 과학자들의 삶이 닮았다. 서로 다른 형식을 알면 알수록 번역되는 세계의 확장은 더욱 빨라 질 것은 자명하다. 다양한 형식들은 책 속에도 있지만,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수많은 글자들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의 머리 속 언어 형식을 많이 알면 알수록 사람들과의 소통이 자유로워지며 관계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기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언어는 사람들이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언어를 통해서 기억을 통해서 극복해 낼 가능성을 제공한다. 사람의 기억이 항상 같을 수 없는 것이기에 번역가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옛 모습은 다이내믹 그대로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난한 과정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멋진 여행과 같은 즐거움의 여정일 것이다. 딱 그 차이. 그 차이에서 사람들은 갈리기 시작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나는 ‘그 차이’라는 지점에서는 언제나 언어의 분화가 있을 것이 자명하다. 신 선생의 책 속에서 검은 것을 뜻하는 영어의 블랙과 하얀 것을 뜻하는 프랑스의 블랑의 말의 뿌리가 같다는 이야기를 만난다. 이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경계’를 떠올린다. 밝고 흰 것의 반대편에 검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경계’. 빅뱅 이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양’이 존재하는 저 편에 ‘음’이 존재하는 방식. 양과 음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 언어의 가지치기에 인간에게 내재된 ‘구분하는 능력’을 읽을 수 있다. 경계라는 담장 위를 오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경계의 바깥을 보고, 비록 그 경계 바깥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경계의 안쪽과 바같쪽과 경계의 담장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오로지 경계라는 당장 위에 서본 자와 서보지 않는 자들의 딱 그 차이에서 비롯된다. 딱 그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매일 같은 것을 보고 매일 같은 것을 경험하지만, 또 다른 한사람은 동시에 3가지를 알고 또 다른 세가지를 또 다른 세가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신 선생의 어도락은 바로 그런 수많은 담장 위의 놀이이겠다 싶다. 마지막 질문으로 번역하시고 싶은 책을 여쭈었다. 스웨덴 작가 빌헬름 모베리가 쓴 18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스웨덴 사람들을 다룬 4부작 서사시 <이민>이라는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하신다. 이주한지 100년이 지난 후 또 10년에 걸쳐 저술한 책이란다. 신 선생의 사유의 고유성이 기대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 선생의 일상이 ‘Migration’이 아닐까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다듬어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경계 바깥으로의 migration이 아니겠나 싶다.
3.
디지털의 첨단기술들을 가까이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 동네인지라, 자연스럽게 번역가의 능력과 기계번역의 능력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훗날 기계번역이 번역가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번역가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렇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의 잉태를 통한 수많은 추상기계들을 앞세울 수 있게 됨으로써 오늘의 인류가 존재하듯이, 지구생명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깨우친 ‘알아가는 능력’을 기계에 이식이 가능하다면, 기계에도 언어의 잉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언어가 인류에게 종속된 것이 아닌 또 하나의 추상기계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멈추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 당연하다.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는 층위들이 정의되고 만 다음에라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계들이 언어를 배우는 속도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를 것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자지 않고, 싫증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따라 붙으면, 기계가 인간의 감각과 운동과 관련한 언어의 습득을 마스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의 언어는 이미 저만치 추상의 세계로 확장되어 있다. 추상의 언어 세계를 배우기 위해서는 추상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반응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직 기계는 인간의 추상 언어에 대한 좋음과 싫음을 스스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실함수가 정의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직 기계학습이 학습을 할 수는 없다. 인류에게 발견되는 그러한 손실함수는 또한 수많은 층위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직 기계는 인간이 뱉어 낸 언어들을 배운다. 기계들에게 ‘구분하고 이름 붙이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인간들의 배설물을 분석하고 배울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migration 해가는 존재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데이터를 생성해놓고 그 데이터들이 전부인양,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그들이 가지지 못하는 ‘욕망’이 있음을. 아직 우리는 그 욕망의 ‘최소 단위’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세상의 무한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5개 언어를 서핑하는 어도락가 신견식 선생께서도 동의해 주지 않을까 싶다. 신 선생께서도 언어를 계속해서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 백을 같이 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기계가 왜 변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어도락가의 머리 속에 꿈틀거리는 언어의 연결망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을까.....누가 이에 대한 과학적 반론이 있으면 참 좋겠다. ^^*
ETRI 이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