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통사의 Talk-Factory가 시즌15, 235차 모임에는 ‘맛’을 언어로 풀어내시는 박상현 맛 칼럼리스트를 모시고 ‘밥의 맛’을 좌우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의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235차 강연을 접하신 분들은 이제 과거의 자신과 절대로 같은 사람일 수 없게 되는 현상을 경험하시게 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일단 박 작가님이 추천하는 쌀을 가지고 다른 밥을 짓고 먹어 본 후부터는 ‘밥의 맛’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머리에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맛에 대한 분별’이 생기고 난 후에는 틀림없이 밥맛을 쫓는 우리의 욕망이 발동을 걸기 때문일 것이라 사료됩니다. 박 작가님은 댁에 최소한 3종류의 다른 특질을 가지는 쌀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밥에도 밥이라는 알맹이를 두고 표현과 내용을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사유의 확장은 덤입니다. 그 덤이 ‘밥 맛’을 추구하게 만들고 밥을 먹는 멋부림을 추동하고 또한 다른 것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발동하는 희열을 경험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새통사는 언제나 우리를 자극합니다. 새통사는 언제나 ‘익숙한 인간세계의 안전한 고독’의 유혹을 떨쳐내게 합니다.
박상현 맛칼럼리스트는 자칭 제2호 맛칼럼리스트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으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 주시는 분들을 칼럼리스트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박 작가님은 ‘맛’에 대한 개성있는 시각으로 맛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시는 컬럼리스트이십니다. 2003년부터 ‘취생몽사(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landy)‘ 라는 블로그를 시작하여, 연속 네이버 파워블로그로 선정되고 2011년에는 한국 100대 블로그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업작가로 전환하여, 맛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어디에서도 박 작가님의 무게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박 작가님의 대표적인 칼럼인 《부산일보》에 ‘부산의 노포’와 《국제신문》에 ‘부산의 요리사들’에서 자신이 가진 지역성과 전문성이 어떻게 밀결합되어 농밀하게 우려지는 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맛’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혀끝이 느끼는 맛이 아님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틈만 나면 일본 큐슈지방을 방문하면서 두 발로 맛을 읽어 낸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라는 멋진 책의 작가이십니다.
*강연 동영상: https://newinsight.kr/43/?bmode=view&idx=11064535&back_url=&t=board&page=1
“쌀이라는 계통 속에서도 풍성한 개성이 춤춘다“
‘일본의 쌀밥은 화가 날 정도로 맛있다.’ 박상현 작가님의 서두이시다. 아니 밥이 얼마나 맛있길래 우리에게 그런 밥이 없다는 것에 화가 날 지경이란 말인가. 순간 맛있는 밥을 떠올리면 입에 군침이 혓바닥 위로 입천장 전체로 화하니 퍼진다. 몸이 강연을 들을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단 한마디에 나의 몸을 준비시키는 것을 느끼며, 강연고수의 공력을 느끼게 된다. ^^* 후기를 자세히 쓴다는 것은 맛깔스런 영화의 스포일러를 미리 질러버리는 해적행위다. 새통사가 강연동영상을 아카이빙 하는 진보 이후에는 후기를 작성하며, 이런 점이 항상 걱정이다. 그래서, 후기의 방향성을 조금 틀 수 밖에 없다. 맛깔스런 강연도 듣고 덤으로 그 강연과 관련하여 사유의 눈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세상이 물질중심적인 것에서 가치중심적으로 무게 이동을 한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가졌다는 만족감이나 남들이 갖지 않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우월감이 지배하는 풍경은 조만간 옛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물질적인 것의 소유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매개로 한 경험이나 가치의 향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우린 한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는 브뤼노 라투르의 아쉬운 한탄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에 접어든 것 같다. 특히나 Alpha세대 Z세대 M세대들은 ‘나다움’의 추구의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과거 기성세대들의 삶의 양식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즐겁게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원전 4세기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깨달음이 25세기가 흐른 지금에 와서야 보편적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면, 우리의 성장은 참으로 더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오늘은 박 작가님의 강연 속에서 쌀이라는 계통을 발견하며,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계통에 계통을 만들어온 경로를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과학기술자들이 시간의 길의 반대방향으로 모든 것을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이야 어떻게 하든 자유이겠지만 그런 류의 사고에 태클을 거는 이유는 많은 사람과 많은 유무형의 사물들이 함께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그동안의 축적의 가치에 대해서 간과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방법론들은 분명 누군가의 노력에 의하여 축적되어 오고 있다. 다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접근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양한 질료들을 동원한 다양한 형식의 표현과 내용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새통사 후기에서 <판짜기>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 속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판짜기>들이 항상 있어 왔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그런 판짜기의 축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에너지를 최소화하여 모두를 위한 일의 성공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로, 누차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런 판짜기의 생태계를 연구하고 축적하는 학문이 공학 工學이다.) 생명진화의 여정에는 수많은 판이 판 위에 새롭게 세워지는 방식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실 중의 하나가 오늘 박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쌀이라는 또 하나의 계통이다. 쌀이라는 기본구조와 쌀로 존재하게 하는 작동 메카니즘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계통이다. 그 계통 속에서 작동의 파라미터들의 다양한 변이를 통해서 각자의 개성을 실험한다. 이것이 개체다. 계통이라는 판이 있으면 개체라는 실험에 있어서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짜여진 구조와 작동 메카니즘을 따르되 파라미터의 값들에 대해서 조금씩 변화를 시켜 가면 개체의 실험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조와 작동이라는 단어 때문에 계통의 발생이 아주 손쉽게 일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기에 과학기술자들이 환원주의에 쉽게 빠진다. 계통은 많은 부분들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전체다. 철학자 스티븐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다양한 부분들을 부드럽게 보듬어온 축적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전체는 부분들의 합과 함께 하지만 부분들의 합이 아닌 이유다. 부분들의 합이 있어 전체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로부터 부분들을 환원해낼 수 없음이다. 많은 부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그 뭔가’를 잉태시키는 상호작용의 산물이 전체이기 때문이다. 박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쌀’이 ‘밥’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똑같은 쌀이면 똑같은 밥이 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맛있는 밥’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쌀’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까지 다시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쌀이라는 짜여진 판이 있기 때문이다. 쌀이라는 판이 있고 또 쌀과 물과 솥과 불이라는 4가지 부분들이 만드는 밥짓기라는 판이 있기 때문에 물의 양을 조절하고 불의 양을 조절하고 솥을 교체해보는 선에서도 다양한 개성있는 밥이 만들어진다. 모든 생명진화는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판짜기라는 계통의 발생이 있고 그 위에서 다양한 개성의 실험인 개체발생이 있다. 분명한 사실을 목격하고도 순간순간 그런 축적들을 사유의 세계에서는 발견이 어렵다. 그것이 시행착오의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낳는다.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당연히 불신을 양산하는 지름길이다.
공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계통이라는 중력장과 개체라는 중력장의 뒤섞임의 세상의 역학을 읽어낸다. 읽어 낸 역학을 역이용하여 인공의 중력장을 만드는 판짜기를 시도한다. 그 판 위에서 수많은 개체의 실험이라는 ‘기술’의 탄생을 유발하게 한다. 이것이 공학의 힘이다. 공학이 강한 나라만이 최소한의 에너지로 남들과 다른 그 무엇(事)을 도모(業)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事業이고 비즈니스다. ^^* ##
밥맛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의 탈바꿈을 가능하게 해주신 박상현 작가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새통사의 Talk-Factory가 시즌15, 235차 모임에는 ‘맛’을 언어로 풀어내시는 박상현 맛 칼럼리스트를 모시고 ‘밥의 맛’을 좌우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의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235차 강연을 접하신 분들은 이제 과거의 자신과 절대로 같은 사람일 수 없게 되는 현상을 경험하시게 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일단 박 작가님이 추천하는 쌀을 가지고 다른 밥을 짓고 먹어 본 후부터는 ‘밥의 맛’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머리에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맛에 대한 분별’이 생기고 난 후에는 틀림없이 밥맛을 쫓는 우리의 욕망이 발동을 걸기 때문일 것이라 사료됩니다. 박 작가님은 댁에 최소한 3종류의 다른 특질을 가지는 쌀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밥에도 밥이라는 알맹이를 두고 표현과 내용을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사유의 확장은 덤입니다. 그 덤이 ‘밥 맛’을 추구하게 만들고 밥을 먹는 멋부림을 추동하고 또한 다른 것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발동하는 희열을 경험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새통사는 언제나 우리를 자극합니다. 새통사는 언제나 ‘익숙한 인간세계의 안전한 고독’의 유혹을 떨쳐내게 합니다.
박상현 맛칼럼리스트는 자칭 제2호 맛칼럼리스트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으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 주시는 분들을 칼럼리스트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박 작가님은 ‘맛’에 대한 개성있는 시각으로 맛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시는 컬럼리스트이십니다. 2003년부터 ‘취생몽사(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landy)‘ 라는 블로그를 시작하여, 연속 네이버 파워블로그로 선정되고 2011년에는 한국 100대 블로그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업작가로 전환하여, 맛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어디에서도 박 작가님의 무게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박 작가님의 대표적인 칼럼인 《부산일보》에 ‘부산의 노포’와 《국제신문》에 ‘부산의 요리사들’에서 자신이 가진 지역성과 전문성이 어떻게 밀결합되어 농밀하게 우려지는 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맛’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혀끝이 느끼는 맛이 아님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틈만 나면 일본 큐슈지방을 방문하면서 두 발로 맛을 읽어 낸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라는 멋진 책의 작가이십니다.
*강연 동영상: https://newinsight.kr/43/?bmode=view&idx=11064535&back_url=&t=board&page=1
“쌀이라는 계통 속에서도 풍성한 개성이 춤춘다“
‘일본의 쌀밥은 화가 날 정도로 맛있다.’ 박상현 작가님의 서두이시다. 아니 밥이 얼마나 맛있길래 우리에게 그런 밥이 없다는 것에 화가 날 지경이란 말인가. 순간 맛있는 밥을 떠올리면 입에 군침이 혓바닥 위로 입천장 전체로 화하니 퍼진다. 몸이 강연을 들을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단 한마디에 나의 몸을 준비시키는 것을 느끼며, 강연고수의 공력을 느끼게 된다. ^^* 후기를 자세히 쓴다는 것은 맛깔스런 영화의 스포일러를 미리 질러버리는 해적행위다. 새통사가 강연동영상을 아카이빙 하는 진보 이후에는 후기를 작성하며, 이런 점이 항상 걱정이다. 그래서, 후기의 방향성을 조금 틀 수 밖에 없다. 맛깔스런 강연도 듣고 덤으로 그 강연과 관련하여 사유의 눈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세상이 물질중심적인 것에서 가치중심적으로 무게 이동을 한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가졌다는 만족감이나 남들이 갖지 않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우월감이 지배하는 풍경은 조만간 옛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물질적인 것의 소유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매개로 한 경험이나 가치의 향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우린 한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는 브뤼노 라투르의 아쉬운 한탄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에 접어든 것 같다. 특히나 Alpha세대 Z세대 M세대들은 ‘나다움’의 추구의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과거 기성세대들의 삶의 양식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즐겁게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원전 4세기경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깨달음이 25세기가 흐른 지금에 와서야 보편적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면, 우리의 성장은 참으로 더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오늘은 박 작가님의 강연 속에서 쌀이라는 계통을 발견하며,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계통에 계통을 만들어온 경로를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과학기술자들이 시간의 길의 반대방향으로 모든 것을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이야 어떻게 하든 자유이겠지만 그런 류의 사고에 태클을 거는 이유는 많은 사람과 많은 유무형의 사물들이 함께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그동안의 축적의 가치에 대해서 간과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방법론들은 분명 누군가의 노력에 의하여 축적되어 오고 있다. 다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접근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양한 질료들을 동원한 다양한 형식의 표현과 내용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새통사 후기에서 <판짜기>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 속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판짜기>들이 항상 있어 왔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그런 판짜기의 축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에너지를 최소화하여 모두를 위한 일의 성공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로, 누차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런 판짜기의 생태계를 연구하고 축적하는 학문이 공학 工學이다.) 생명진화의 여정에는 수많은 판이 판 위에 새롭게 세워지는 방식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실 중의 하나가 오늘 박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쌀이라는 또 하나의 계통이다. 쌀이라는 기본구조와 쌀로 존재하게 하는 작동 메카니즘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계통이다. 그 계통 속에서 작동의 파라미터들의 다양한 변이를 통해서 각자의 개성을 실험한다. 이것이 개체다. 계통이라는 판이 있으면 개체라는 실험에 있어서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짜여진 구조와 작동 메카니즘을 따르되 파라미터의 값들에 대해서 조금씩 변화를 시켜 가면 개체의 실험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조와 작동이라는 단어 때문에 계통의 발생이 아주 손쉽게 일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기에 과학기술자들이 환원주의에 쉽게 빠진다. 계통은 많은 부분들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전체다. 철학자 스티븐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다양한 부분들을 부드럽게 보듬어온 축적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전체는 부분들의 합과 함께 하지만 부분들의 합이 아닌 이유다. 부분들의 합이 있어 전체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로부터 부분들을 환원해낼 수 없음이다. 많은 부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그 뭔가’를 잉태시키는 상호작용의 산물이 전체이기 때문이다. 박 작가님께서 말씀하시는 ‘쌀’이 ‘밥’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똑같은 쌀이면 똑같은 밥이 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맛있는 밥’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쌀’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까지 다시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쌀이라는 짜여진 판이 있기 때문이다. 쌀이라는 판이 있고 또 쌀과 물과 솥과 불이라는 4가지 부분들이 만드는 밥짓기라는 판이 있기 때문에 물의 양을 조절하고 불의 양을 조절하고 솥을 교체해보는 선에서도 다양한 개성있는 밥이 만들어진다. 모든 생명진화는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판짜기라는 계통의 발생이 있고 그 위에서 다양한 개성의 실험인 개체발생이 있다. 분명한 사실을 목격하고도 순간순간 그런 축적들을 사유의 세계에서는 발견이 어렵다. 그것이 시행착오의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낳는다.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당연히 불신을 양산하는 지름길이다.
공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계통이라는 중력장과 개체라는 중력장의 뒤섞임의 세상의 역학을 읽어낸다. 읽어 낸 역학을 역이용하여 인공의 중력장을 만드는 판짜기를 시도한다. 그 판 위에서 수많은 개체의 실험이라는 ‘기술’의 탄생을 유발하게 한다. 이것이 공학의 힘이다. 공학이 강한 나라만이 최소한의 에너지로 남들과 다른 그 무엇(事)을 도모(業)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事業이고 비즈니스다. ^^* ##
밥맛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의 탈바꿈을 가능하게 해주신 박상현 작가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