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강연모음

190329 제154차_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역사와 현실 (정재정 교수, 동북아 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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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54차 새통사 모임에서는 동아시아 근현대사학자이시자 철도사에 정통하신 정재정 교수님을 모시고 남북 두정상의 판문점 선언과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열차를 계기로 우리들 곁에 새롭게 다가오는 철도에 대한 다양한 생각나누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 교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철도노선도와 유라시아 철도네트워크나 동경을 기점으로 하는 국제철도열차의 계통도나 운용도에서 철도라는 네트워크는 단순히 기차가 달리는 길 이외의 다양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을 담고 있는 거대한 역사서였습니다. 그만큼 철도는 기능적 측면 이면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것임을 확인하고 우리의 헤드랜턴이 비추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의 경험들과 지식들과 연결하며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철도네트워크의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열리지 않는 세상의 더딤과 처짐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을 보여주시면서, 열린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심과 동시에 열림이 가지는 양면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역사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실현하는 전략과 실천임을 강조해 주셨습니다.     


정재정 교수님이 철도네트워크를 매개로 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1979년 일본 유악 길을 떠날 당시 일본 역사학계는 식민 지배를 미화하며 ‘우리가 한국에 철도를 놓아주지 않았느냐’는 시각이 팽배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식민의 아픔이 있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각도에서의 주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양자가 모두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근현대사 전반의 폭넓은 연구를 통하여 단행본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1894~1945(1999)’를 내셨고, 작년에는 국제적인 교통도시로서의 서울을 조망해보는 ‘철도와 근대 서울’을 펴내기도 하셨습니다. 정 교수님은 올바른 역사의 도모를 통하여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하시는 등 역사문제연구소,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사연구회, 경제사학회, 한일관계사학회 등에서 활약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서울역사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등의 위원, 한일미래포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의 운영자문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과 일본, 중국, 북한, 독일, 미국 등의 역사공동연구에 참가하고, 한일 양국정부가 지원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1,2기)의 총간사를 겸임하는 등 동아시아의 미래 비전을 만들어 가시고자 힘을 쏟고 계시는 동아시아관계 권위자십니다.      


1. 철도는 국력의 바로미터다. 

-정재정 교수님은 동북아의 철도공동체에 대한 과거를 반추해보고 현실을 직시해보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하시며 강연을 시작해 주신다.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강연을 듣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동체란 운명이나 생활을 같이하는 조직체라는 의미이다. 철도네트워크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강연을 통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 교수님은 해방직전이 한반도의 철도망 개황도를 보여주시며 끝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나가신다.  한 눈에도 일본이 만들어 놓은 철도가 한반도의 혈관처럼 느껴질 정도로 촘촘하다. 검은색의 국철도와 주황색의 민간철도는 한반도 요소요소를 연결하는 혈관 그 자체였다. 

-그 혈관같은 철도는 우리에겐 좋은 기억일수만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토지를 수탈당했는가를 생각하면 징그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동서남북의 모든 꼭지점인 부산, 목표, 신의주, 만포나진, 선봉, 아오지, 남양 등이 북경으로 가는길 만주로 가는 길, 시베리아로 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끝이 아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시작하여 1905년에 신의주~용산간 구간을 완성하고, 1908년에는 신의주-부산간 구간을 완성하며,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산동과 만주와 몽고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위한 중일군사동맹이 맺어진 1915년에 완벽한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라시아 철도네트워크는 일본열도의 철도네트워크와 한반도 철도 네트워크와 만주횡단철도네트워크와 시베리아 횡단철도 네트워크와 유럽 대륙내의 촘촘한 철도 네트워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증거물로, 1940년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에스토니아의 탈린까지 가는 승차권의 사진을 보여주신다. 손기정 옹께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동경발 베를린 기차표도 보여주신다. 그리ㅏ고 그 당시에 서울에서 파리나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고 하신다. 기차표가 일본글자로 되어 있다. 일본말로 되어 있어도 국경 통과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 앞에 철도가 단순히 열차가 달리는 길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해방 직전의 1940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선언에 즈음한 대동아공영권 주요 교통로(1943)로는 일본제국주의의 동맥에 있어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해군력에 있어서 서방세력에 비하여 열세에 있었던 일본제국의교통로에 있어서 한반도의 철도네트워크는 전천후의 군사시설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고대 로마의 도로망이 제국의 번영과 안녕을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반대로 말기의 이민족의 침략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길’이라는 존재다. ‘길’ 중에서도 철길이라는 존재는 도로와 달리 거대한 응축된 힘의 이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열차가 달리기 위해서는 규격화된 철로가 기본이다. 만일 열차가 전기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전기의 통일도 필수다. 뿐만 아니라, 철도네트워크 내에서 사용되는 용어도 통일이 필요하다. 힘의 균형과 상호이익의 공감 없이는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 철도네트워크다. 당연히 힘의 균형에 끼일 수 없는 세력들은 이용만 당하는 존재가 되거나 수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철도네트워크의 기본 특성이다. 네트워크 자체가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철도를 연결하는 철도네트워크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철도네트워크의 탄생 이면에는 반드시 힘의 작용에 따른 견제와 협상이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다. 


2. 철도의 양면성



-정 교수님은 철도는 한마디로 문명의 이기인 동시에 흉기라고 말씀하신다. 대한제국 반포이후부터 해방까지 일본은 한반도에 총6,400km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했다고 하신다. 그 철도망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배력을 강화하고 물자를 수탈하기 위한 철저히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철도는 침략과 개발, 수탈과 근대, 차별과 편리라는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분명 우리에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철도임에 분명했다. 가장 큰 변화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의 변화다. 하루를 12지간으로 나누던 시간의 관념이 최소한 분 단위로 바뀌어야 했다. 경성을 거쳐 지나가는 동경발 국제 열차는 경성을 새벽 2:47분과 새벽 3:30분에 통과한다. 시간의 단위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세상을 좀 더 촘촘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잉여를 생산한다. 경성역을 통과하는 열차는 부산, 대전, 대구, 목포, 광주,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 청진, 회령, 상삼봉, 남양, 나진, 웅기 등의 한반도 전역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신의주를 거쳐 안동, 봉천을 거쳐 북경도 갈 수 있게 되었고, 봉천을 지나 신경(장춘), 남영을 지나 목단강을 거쳐 만주의 가목사까지도 철도로 다녀올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더 진취적인 사람은 당연히 파리나 모스크바도 자연스럽게 꿈꿀 수 있는 공간에 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의 시공간의 변화는 그 공간과 연결된 수많은 역사와 인물과 책과 사상들과 사회상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엄청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 자명하다. 

-두번째로는 비록 화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긴 했지만, 열차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공간에 섞여 앉을 수 밖에 없었기에 사회적으로 일종의 개방의 현장 역할을 담당했다. 최남선 선생님의 경부철도가(1908)를 들어보면, 분명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많은 변화를 불러 왔음이 분명해 보인다. 한 달음에 남쪽 땅 전체가 머리를 쓰치고 지나간다. 싸릿대 안의 좁은 생각에서 남쪽 땅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경부텰도노래/최남선 (https://youtu.be/m6GLyCoWH40)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친소 다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와 연화봉 둘러보는 중 /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달았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집 /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서관(西關)가는 경의선 예서 갈려서 / 일산수색 지나서 내려간다오

옆에 보는 푸른 물 용산나루니 / 경상 강원 웃물배 뫼는 곳일세


독서당(讀書堂)의 폐(廢)한 터 조상하면서 / 강에 빗긴 쇠다리 건너나오니

노량진역 지나서 게서부터는 / 한성(漢城) 지경(地境) 다하고 과천땅이다.


조조양양 흐르는 한강물소리 / 아직까지 귀속에 쳐져있거늘

어느 틈에 영등포 이르러서는 / 인천차와 부산차 서로 갈리네 


예서부터 인천이 오십여 리니 / 오류 소사 부평역 지나간다네

이 마음에 틈을 타 다시 갈 차로 / 이번에는 직로로 부산가려네


관악산의 갠 경 우러러보고 / 영랑성의 묵은 터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시흥역 거쳐 가지고 / 날개 있어 나는 듯 안양이르러


실과 같은 안양내 옆에 끼고서 / 다달으니 수원역 여기로구나

이전에는 유수도(留守道) 지금 관찰부(觀察府) / 경기도의 관찰사 있는 곳이라


경개 이름 다 좋고 서호(西湖) 항미정(杭眉亭) / 그 옆에는 농학교(農學校) 농사시험장

마음으로 화영전(華寧殿) 첨배(瞻拜)한 후에 / 대성인의 큰 효성 감읍(感泣)하도다


달 바라는 나각(螺閣)은 어찌되었나 / 물 구경 터 화홍문 변이 없는지

운담(雲淡) 풍경 때맞춰 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 / 양어(養魚) 상연(賞蓮) 겸하는 만석거(萬石渠)로다


광교산을 옆하고 떠나나가서 / 잠시간에 병점역 이르렀도다

북(北)에 뵈는 솔밭은 융릉 뫼신 데 / 이름높은 대황교(大皇橋) 거기 있다오


이다음에 정차장 오산역이니 / 온갖 곡식 모이는 큰 장거리오

그 다음에 정차장 송탄역이니 / 물새사냥 하기에 좋은 터이라


서정리를 지나서 평택이르니 / 들은 늦고 산낮아 들만 넓도다

묘한 경개 좋은 토산(土産) 비록 없으나 / 쌀 소출은 다른데 당하리로다


게서 떠나 성환역 다달아서는 / 해가 벌써 아침때 훨씬 겨웠네

오십년전 일청전 생각해보니 / 여기 오매 옛일이 더욱 새로워


일본사람 저희들 지저귀면서 / 그 때 일이 쾌하다 서로 일컬어

얼굴마다 기쁜 빛 가득하여서 / 일본남자 대화혼(大和魂) 자랑하는데


그 중에도 한 노파 눈물 씻으며 / 그 때통에 외아들 잃어 버리고

늙은 신세 표령(飄零)해 이 꼴이라고 / 떨어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니


말말마다 한이오 설움이어서 / 외국사람 나까지 감동되거늘

쓸데없는 남의 공 자랑하기에 / 저의 동포 참상을 위로도 없네


척수루의 빈 터는 볼 수 있으나 / 월봉산의 싸움터 자취 없도다

안성천의 다리를 얼른 건너서 / 순식간에 직산역 와서 닿았네


백제국의 첫 도읍 위례성 터는 / 성암산에 있으니 예서 삼십리[8]

천오동에 놓았던 구리 기둥은 / 돌 주초만 두개가 남았다더라


이편저편 보는 중 모르는 틈에 / 어느 덧에 천안역 다달았도다

온양온천 여기서 삼십리이니 / 목욕하러 가는 이 많이 나리네[9]


인력차와 교자가 준비해있어 / 가고 옴에 조금도 어려움 없고

청결하게 꾸며논 여관있으나 / 이는 대개 일본인 영업이라니


이런 일은 아무리 적다하여도 / 동포생업 쇠함을 가히 알리라

그네들이 얼마나 잘하였으면 / 이것 하나 보전치 못하게되오


백제 때에 이 지명 탕정(湯井)이라니 / 그 때부터 안 것이 분명하도다

수천년간 전하던 이러한 것을 / 남을 주고 객(客)되니 아프지 않소


소정리와 전의역 차례로 지나 / 갈거리(葛居里)를 거쳐서 조치원오니

낙영산(落影山)의 그림자 멀리 바라고 / 화양서원 옛일을 생각하도다[12]


내판역을 지나서 미호천건너[13]/ 몇십분이 안되어 부강역이니

충청일도 윤내는 금강가이라 / 쌀 소금의 장터로 유명한데오


사십리를 격조(隔阻)한 공주 고을은 / 충청남도 관찰사 있는 곳이니[14]

내포(內浦) 일판 너른 뜰 끼고 앉아서 / 이 근처의 상업상 중심점이오


계룡산(鷄龍山)의 높은 봉(峰) 하늘에 닿으니 / 아(我) 태조(太祖) 집 지으신 고적(古蹟) 있으며

금강루의 좋은 경(景) 물에 비치니 / 옛 선비의 지은 글 많이 전하네


마미(馬尾) 신탄(新灘) 지나서 대전 이르니 / 목포(木浦)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

오십오 자(五十五尺) 돌미륵(彌勒)[19] 은진(恩津)에 있어 / 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오


증약지나 옥천역 다달아서는 / 해가 벌써 공중에 당도하였네

마니산성 남은 터 바라보는중 / 그 동안에 이원역 이르렀도다


속리사(俗離寺)가 여기서 삼십리라니 / 한번 가서 티끌 마음 씻을 것이오

운연(韻連) 죽던 양산(陽山)이 육십 리(六十里)라니 / 쾌남아(快男兒)의 매운 혼 조상하리라


고당포를 바라며 심천이르니 / 크지 않은 폭포나 눈에 띠우고

그 다음에 영동역 다다라서는 / 경부사이 절반을 온 셈이라


이십사번(二十四番) 화신풍(花信風) 불어올 때에 / 때 좋다고 꽃피는 금성산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하여 / 꽃다운 혼 스러진 낙화대(落花臺)로다


미근 황간 두역을 바삐 지나서 / 추풍령의 이마에 올라타도다

경부선 중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 / 예서부터 남쪽은 영남이라오


얼마 안가 김천역 다달아보니 / 이전부터 유명한 큰 장거리라

사통하고 팔달한 좋은 덴 고로 / 이 근처에 짝 없이 굉장하다네


그 다음의 정차장 금오산이니 / 이름 있는 도선굴 있는 곳이라

산 아래 지었던 길재 사당은 / 지낸 세월 오래라 저리되었네


금오산성(金烏山城) 너른 곳 지금 어떠뇨 / 세 연못과 한 시내 그저 있는지

무릉도원 깊은데 역사(役事) 피하듯 / 이전부터 그 근처 피란(避亂) 곳이라


약수역[32]을 지나면 왜관역이니 / 낙동강의 배편이 예가 한이요

삼백년전 당하던 임진왜란에 / 일본군사 수천명 머무던 데라


왜관 지나 신동에 신동 지나면 / 영남천지 제일 큰 대구군이라

경상북도 모든 골 작고 큰 일을 / 총할(總轄)하는 관찰사(觀察使) 여기 있으니


부하(府下) 인구 도 총합 사만오천에 / 이천이백 일본인 산다하더라

산 이름은 연귀(連龜)이나 거북 못 보고 / 집 이름은 영귀(詠歸)나 관원 있도다.


연년마다 춘추로 열리는 장(場)은 / 우리나라 셋째의 큰 교역이니

대소 없이 안 나는 물건이없고 / 원근없이 안 오는 사람이었네


누구누구 가르쳐 팔공산인지 / 일곱 고을 너른 터 타고 있으되

수도동의 폭포는 눈이 부시고 / 동화사의 쇠북은 귀가 맑도다


달성산의 그윽한 운취 끼고서 / 경산군을 지나서 청도이르니

청덕루의 불던 피리 소리가 없고 / 소이서국(小伊西國)[38] 끼친 예(禮) 그림자도 없네


성현터널 빠져서 유천다달아 / 용각산을 등지고 밀양이르니

장신동의 기와집 즐비한 것은 / 시골촌에 희한한 경광이러라


밀양군은 영남의 두서넛째니 / 예전에서 도호부 두었던 데라

상업상에 조그만 중심이되어 / 상고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네


객관(客館) 동편(東便) 영남루(嶺南樓) 좋은 경개는 / 노는 사람 지팡이 절로 멈추고

만어산에 나는 돌 쇠북과 같이 / 두드리면 쟁쟁히 소리난다네


그 다음에 있는 역 삼랑진이니 / 마산포로 갈리는 분기점

예서부터 마산이 백 리 동안에 / 여섯 군데 정차장 지나간다네


원동역을 지나서 물금에오니 / 작원관(鵲院關)을 찾으며 낙동강 끼고

머지 않은 임경대 눈앞에 있어 / 천하재자(天下才子) 고운(孤雲)을 생각하도다


통도사가 여기서 육십 리인데 / 석가여래 이마뼈 묻어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절 으뜸이 되니 / 천 이백 칠십년 전 이룩한 바라


물금역을 지나면 그 다음에는 / 해육운수 연하는 구포역이라

낙동강의 어귀에 바로 있어서 / 상업 번성하기로 유명한 데라


수십분을 지난후 다시 떠나서 / 한참 가니 부산진 거기로구나

우리나라 수군이 있을 때에는 / 초선두어 요해처(要害處) 방비하더니


해외 도적 엿봄이 끊이었는지 / 남의 힘을 빌어서 방비하는지

해방함 한척 없이 버려 두었고 / 있는 것은 외국기 날린 배로다


수백년전 예부터 일인(日人) 살던 곳 / 풍신수길 군사가 들어올 때에

부산으로 파견한 소서행장의 / 혈전하던 옛 전장 여기 있더라


범어사 대찰이 예서 오십리 / 신라 흥덕왕시에 왜관 십만을

의상이란 승장이 물리치므로 / 그 정성을 갚으려 세움이라네


삼십리를 떨어진 동래 온정은 / 신라부터 전하는 옛 우물이라

수 있으면 도상의 피곤한 것을 / 한 번 가서 씻어서 뉘기리로다


영가대(永嘉臺)의 달구경 겨를 못하나 / 충장단의 경배야 어찌 잊으리

초량역을 지나선 부산항이니 / 이 철도의 마지막 역이라 하네


부산항은 인천의 다음 연 데니 / 한일 사이 무역이 주장이 되고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닿네


수입수출 통액이 일 천 여만원 / 입항출항 선박이 일백 여만 톤

행정사무 처리는 부윤[46]이하고 / 화물출입 감독은 해관이하네


일본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도 일인(日人)이부려 /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한성 남산 신령이 없기전부터 / 윤산 신령 없은 지 벌써 오래니

오늘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 강개함도 도리어 어리석도다


검숭하게 보이는 저기 절영도 / 부산항의 목쟁이 쥐고 있으니

아무데로 보아도 요해지이라 / 이충무의 사당을 거기 모셨네


인천까지 여기서 가는 동안이 / 육십시간 걸려야 닿는다는데

일본 마관까지는 불과 일시에 / 지체없이 이름을 얻는다하네


슬프도다 동래는 동남 제일현 / 부산항은 아국중 둘째큰 항구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게 / 저렇 듯한 심한양 분통하도다


우리들도 어느 때 새 기운 나서 / 곳곳마다 잃은 것 찾아 들이여

우리장사 우리가 주장해보고 / 내나라 땅 내 것과 같이 보일가


오늘 오는 천 리에 눈에 띄는 것 / 터진 언덕 붉은산 우리같은 집

어느 때나 내 살림 넉넉하여서 / 보기 좋게 집 짓고 잘살아보며


식전부터 밤까지 타고온 기차 / 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

어느 때나 우리 힘 굳세게되어 / 내 팔뚝을 가지고 굴려볼거나


이런 생각 저생각 하려고 보면 / 한이없이 뒤대에 연적나오니

천리길을 하루에 다달은 것만 / 기이하게 생각되 그만둡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신분에 따라 차별을 받던 생각에서 돈에 따라 1등석과 2등석과 3등석을 나누어 앉아 가는 자본주의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였기에, 신분제의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음이 느껴진다. 

-식민시대와 함께 다가 온 철도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한반도의 주인이 우리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철도를 모두 일본이 부설하고 운영했기에, 역이름이 우리식 이름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평양은 헤이죠오, 사리원역은 샤리잉으로 .... 잘못 알아듣기 일 수인데도 열차의 행선지를 물으면 발로 걷어차이기 일 수였다고 하신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노선이 지금처럼 ‘상행선’이 아니라 ‘하행선’이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 동경에서 식민지 경성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이 식민지의 땅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하기에 또 철도는 우리으 독립군의 물자와 인력을 실어나르는 역할도 했을 뿐만 아니라, 3.1독립선언서를 실어 나르는 중요한 운송수단 역할도 함께 했다. 

-이렇듯 철도는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바로 굴육의 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밖에 없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철도이기에, 정 교수님께서는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철도네트워크의 모습으로부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열차의 이름은 시대의 희망을 담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일본이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열차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쩌면 과거 제국주의 시절이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찔하지 않는가?   


3. 대한민국 도약의 징검다리, 동북아 철도공동체

-정 교수님은 6.25전쟁이후, 대한민국은 반도국이 아니라 철저히 섬이었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섬나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섬나라 사람 한국사람들은 북한 땅이 기억 속에서 살라졌다. 요동 땅이 머리 속에서 사라졌고 만주 땅이 머리 속에서 사려져 버렸다. 그저 비행기를 타고 당도하는 청도, 연변, 상하이, 대련, 원저우, 웨이하이, 북경,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머릿 기억의 전부다. 1943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주요교통로를 보시라....중국의 행상무역도시들을 장악한 일본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촘촘히 그들이 점령한 땅들을 머릿속에 기억하며 그들 사유세계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그들의 사유세계에 그러한 공간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스케일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 자명해 보인다. 시장을 생각해도 우리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규모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거대한 ‘단일시장생태계’가 가지는 매력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한 촘촘한 시공간의 사유는 분명 굳건한 힘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 교수님의 말씀이다. 


-다행스럽게도, 해방 직후 일본의 모든 것을 몰아내기에 바빠 철도산업이라는 거대한 노하우의 힘을 배우는 것을 소홀히 했던 뼈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북한과는 다른 개방사회를 지행해 온 덕분에, 우리 한국은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일구어 냈으며, 기술력과 지력 또한 국제적인 수준에 올라섰다.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 평화, 인권, 환경 등의 문화적 수준도 선진국에 근접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강조해 주신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저력은 바로 한국의 강인한 개척정신이라고 말씀해주신다. 정 교수님은 한국의 그 강인한 개척정신과 일본의 뛰어난 노하우를 합치는 전략을 설파해 주신다. 서로의 강점을 대등한 입장에서 합쳐서 중국이 가지는 규모의 경제가 가지는 강력한 이점을 결합하는 동북아경제공동체를 실현할 혈관의 역할을 동북아철도네트워크가 담당할 수 있다면, 동북아의 공동번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런 거대한 공동의 지향점이 공감대를 이룬다면, 순차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지금처럼 태평스럽게(?) 일자리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한일간의 해저터널도 한중간의 해저터널도 함께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거대한 철도공동체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게 할 사전 정지 작업인 다양한 표준화 작업도 서둘러야만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러나 우리들 앞엔 과거 70~100년전에 실제로 살아 움직였던 철도공동체가 존재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픈 기억일지라도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재산임에 분명하다. ## 

  

과학기술자들에게 역사 속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답이 있음을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 낯선 걸음을 단숨에 달려 와주신 정재정 교수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동북아철도공동체의 완성이라는 불을 피워 주시길 항상 응원 드립니다.